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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유학생들의 목회와 이승만 이대위
1905년 8월 일본 저지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윤병구와 이승만
 
박성모 기사입력  2009/05/12 [01:07]
 이민 초기 유학생들의 목회와 이승만  이대위

    하와이에 1903년 1월 정규 노동이민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하던 이민시기에 정규 이민이 아닌 망명이나 유학 등의 목적으로 들어오는 동포들이 상당했다. 이민 초기 선교와 유학을 목적으로 1903년 윤병구, 신흥우, 이대위 등이 도미하고 1904년에는 이승만, 1905년엔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 유일한, 그 외에도 신성구, 백일규, 이원익, 강영승. 강영대, 차의석, 송헌주. 임정구, 양주삼 등과 그 밖의 40명 정도나 되며 이들의 대학졸업율도 75%나 됐다. 이들 대부분은 한일합방으로 귀국하지 못하여  미국에 거주하며 활동했다.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p.36) 이들 중 상당수가 초기 재미사회와 교회, 그리고 이후 계속하여 신실한 기독자로서 국내외에서 교회와 동포단체들을 조직하고 동포의 권익과 구국운동을 펼쳤기에 본장에선 그  대표적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일별하려 한다. 이들의 이민사회 특히 최초 한인교회를 통한 목회활동과 구국운동은 이민 전기의 맨 마지막에 도미한 안창호의 활동과  함께 재미사회와 교회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05년 8월 일본 저지요청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윤병구와 이승만>

    190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한국침략이 날로 심화하여 국내에서는 이를 저지할 아무런 힘이나 방도도 없던 때다. 더욱이 1905년 초는 일본이 한일 을사조약을 준비하여 조정을 압박하던 한국역사에 최위기의 시점이었다. 바로 이런 위기의 시기에 배재학당에서 서구문명을 공부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청년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경위로 도미하게 된다. 윤병구는 하와이에 막 도착한 한인들이 저들을 돌보아줄 기독교 전도자를 요청함에 따라 1903년에 하와이에 도착하여 바로 이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한국에서 6년여나 옥고까지 치룬 이승만은 그를 염려하고 아끼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4년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게 됐다. 사실 그는 나라가 이미 일본의 침략에 기우는 것을 목도하고, 한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을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 그는 하와이를 경위, 동년 12월31일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다음 해에  워싱턴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들의 길은 달랐으나 나라와 동족을 염려하며 일본의 침략마수에서 조국을 지켜보려는 일념에는 차이가 없었다.

   윤병구는 배재학당과 대한제국의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자로서  선교사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1897년에는 죤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하와이에 도착하여 전도사업을 하는 한편 1903년 8월 7일에는 홍승하, 안전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공동 이익과 교육에 힘썼다. 1905년 제1회 감리교 연회의 한인 교역자 파송기에 따르면 윤병구는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회보’ ( Korean Christian Advocate)의 주필로 활동하고, 이승만은 고국의 장래를 염려하며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하늘의 섬리인지는 모르나 이 두 애국청년들에게 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애국적 대 과제가 주어젔다. 일제의 한국침략에서  미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보호하자는 시도였다. 하와이와 대륙에 있는 동포들이 총력을 기울여 이 두 대표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 한민족의 뜻을 전달하며 한미수호조약을 따라 한국이 위기에 직면하였기에  미국의 도움으로 보호를 받자는 결의였다.

   이는 재미한인들의 첫번째 정치적인 구국운동이요 윤병구와 이승만이 함께 펼칠 최초의 주요 과제였다. 하와이의 뜨거운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동포들이 일제의 침략에서 조국을 구출해보려고 전도자와 유학생으로 온 젊은 이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룰 구원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은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그의 협조로 뉴헴프셔주 포츠머드 (Portsmouth)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으로부터 한국보호를 요청하는 대표로 윤병구를 선출했다. 아마도 저들은 윤병구를 재미사회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을 위해 동포들의 의사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로 간주한 듯하다. 물론 윤병구도 이  준비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여하튼 1905년 7월9일 이화침목회와 공립협회는 러일평화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윤병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아울러  워싱톤에서 공부하는 이승만을 통역으로 임명하여 뉴헴프셔에서 열리는 러일 강화회의에 이들이 한국문제를 제출하도록 했다.  여기엔 하와이 감리교회 개척에 많은 도움을 준 워드멘 (John Wadman)감리사와 하와이 총독 대리인 애트킨슨 (Athokins)의 도움이 컸다. 하와이 동포들은 이곳을 방문하는 미정부 국방담당 비서관 태프트 (William Taft)를 열열하게 환영하고 윤병구를 그에게 소개하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추천장을 받았다.
 
   윤목사는 샌프란시스코로 와 한인들과 의논하며 죠지 워싱턴대에서 공부하는 이승만과 함께 1905년 8월 4일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배이 새가모어힐의 사저에 머물고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뉴욕타임즈 (1905년 8/4,5일자)에 따르면 한국의 두 청년 윤병구 대표와 이승만이 루스벨트 방문기를 “한국 보호를 루스벨트에게 청원할 계획” ( Wii Ask Roosevelt To Ptrotect Koreans)이라는 제하에 상세히 설명한다. 기사에 의하면 두 대표는 사전의 약속도 없이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하여 우선 하나 뿐이 호텔에 머물게 된다. 이 호텔은 루슫벨트를 방문하는 국내외의 방문객들이 유숙하는 곳으로, 초췌한 한국의 청년들이 투숙하기 위해선 약간의 실갱이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들은 윤병구와 이승만( P.K. Yoon and Syngman Rhee) 이름으로 호텔에 기재하며 유숙이 허락되었고, 기자들의 주목을 끓어 서투른 영어 ( broken English) 이지만 한 시간 가량 기자들과 한국문제를 토의할 수 있었다.

    윤목사는 자신과 이승만은 고종황제의 특사나 한국정부의 대표자로 온 것은 아니요 자주독립을 갈구하는 모든 한민족과 미국에 거주하는 8,000여명의 한인동포들을 대표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그들 가슴 속에 품은 심정을 전하려 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계속하여 “우리 한인들은 미국이 한국과 처음으로 조약을 맺은 수교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을 우방으로 믿고있다. 한미간의 수호조약은 아직도 유효하며, 이는 한국이 다른 서방국가들과 수교하는 데 있어 기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어려움에 처한 한국이 미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 미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바라는 것은 한국문제에 대해 이해와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윤목사의 발언과 함께 그들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려는 청원서를 미리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사실도 보도하며, 이는 대통령이 보기 전에 청원서를 공개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윤목사 일행은 저녁 때가 되도록 기다렸으나 새가모어힐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기에 초조하게 기대렸다. 날이 기울기 시작하던 아주 늦은 시간에야 연락이 와, 이들은 마차를 타고 대통령의 비서인 반즈 ( Barnes) 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대표들이 루스밸트 대통령을 만나는 약속 시간은 1905년 8월 4일 오후 4시 30분이었다. 설래는 마음으로 사가모어힐로 가는 도중 이들은 대통령을 만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러시아의 두 대표들 ( M. Witte & Baron Rosen)을 마주쳤다. 기사에 따를면 러시아대표들은 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 같했으나 한인들은 그들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약 30분 동안 루스벨트를 접견했다. 이들은“우리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각하의 힘을 빌리려 왔습니다”라며  준비해온 탄원서를 제시했다. 이 문서는 오는 길에 서재필도 만나 검증을 받은 영문 탄원서의 내용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적 안전을 존중하고 보장키로 한 조약을 무시하고 사실상 대한제국의  침략을 합리화하며 추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양국의 강화조약을 조정하는 루스벨트 대통령께서 1882년 한미 우호조약 정신에 입각하여 이런 일본의 계획을 중지하고 한국이 일본제국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간섭하여 주기를 앙망하나이다.” 탄원서를 끝까지 읽은 루스벨트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 약속하며, 탄원원서를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보내면 포츠머드 강화회의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공사를 통헤 국무장관에게 정식으로 제출하라는 친절한 조언까지 해주었다. 이들은 일시에 한국문제가 해결될 듯안 감격을 안고 곧바로   워싱턴의 김윤정 공사를 찾아 경위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재미공사 김윤정은 한국정부의 아무런 지시를 받은 바 없다며 협조를 거절했다. 두  대표는 김공사와 심한 설전을 벌렸고, 이승만은 김공사의 집에까지 찾아가 협조를 간청했다. 그러나 김공사가 계속 완강히 협조를 거부했기에 이승만은 김공사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위협적인 극언까지 했다. 마침내 김공사는 집을 안나가면 경찰을 부르겠다 경고하기에 두 대표는  청원서의 공식적인 제출이나 회의참석을 포기하고 말았다. 일제가 이미 한국의 정권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김공사도 벌써 일인들의 마수에 걸려있거나 위협 속에 있는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조국의 위기 앞에서 취한 김공사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다.(김원용, 상기서 PP.234-5; 최복윤, 미국속의 한국인. pp.141-2;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 상기서  P.161  등). 결국 1905년 9월5일 포츠머드 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점차적인 지배는 인정되고, ‘가츠라-태프트 밀약’도 성사되어, 일본은 한국합병에 장애되는 국제적 제약을 벗어나게 되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강압으로 체결하고 11월29일에 공포했다. 다음 해 1906년 2월5일에는 해외의 모든 한국인은 일본 영사관의 관할권하에 부속한다고 통고했다.

   이승만과 헤어진 윤병구는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선교사업에 정진하며 1906년 5월 1일 하와이 여러 지역 한인교회의 청년회 대표들과 함께 연합하여 엡웟 친목회를 결성했다. 가와이섬의 김해석, 현순, 마위섬의  김승한, 홍치범, 하와이섬의 최진태, 오하우섬의  황인환, 김성권, 김이제 등과  호놀룰루 대표로 윤병구가 참석하여 회의 결성을 마치고 한국에서도 전도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1908년 윤병구는 하바드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고 이때에 막 하바드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하는 이승만과 다시 접촉하게 되는 듯하다. 그러나 윤병구의 하바드대학 수학은 그리 길지 못했고, 1907년부터는 사임한 양주삼에 이어 상항한국인 연합감리교회의 담임자가 되어 민족적인 목회와 구국운동을 계속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가진 한인자유대회 때에도 그 대표로 활약하며 민족운동을 그치지 안했다.

     그러나 정치학 공부에만 전념하던 이승만은 하바드에서 1908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뉴욕으로 옮겨와 코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에 등록했으나 장로교 선교위원회의 헐 목사 (Rev. Earnest F. Hurl)의 주선으로 뉴저지 프린스턴대학의 장학금을 받게되어 학교를 전학하고 정치학을 전공하여 마침내 1910년 7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 중립론”이란 논문으로 한국인으로는 미국에서 최초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는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당시의 총장 윌슨의 명의로 수여되었고, 이런 사제의 인연으로 이승만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뒤에 미 대통령 윌슨에게 항일 한국독립의 후원을 위한 청원서를 또 한번 제출했었다. 그러나 이런 뜻을 이루지 못한 이승만은 학업을 마친 뒤 동년 9월 유럽을 경유 귀국했다. 

   이슴만은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고 싶었으나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떠나온 조국의 암울한 현장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이승만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같다. 확실히 그의 청소년 시절은 당시 많은 애국청년들같이 항일 애국의 투철한 독립정신으로 살며 지도력을 키우던 때였다. 1874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여,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던 이승만은 1896년 서재필이 조직하던 정치단체인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약함으로써 정치무대에 참여한다.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통해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민중을 계몽하고 민권운동을 주도하던 일들이 고종과 조정의 비위를 거슬러 국외로 추방되고, 회장직을 윤치호가 맡을 때에 이승만은 이상재 등과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게속했다. 조정 안팎의 수구세력들은 이들의 애국적 민중운동이 위험하게 보였고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죄목으로 일단의 애국청년들을 체포 구금하던 1899년1월 이승만도 구금되었다. 구금된 청년들 중에 이승만은 죄질이 무겁고 주모자급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6년여의 옥살이를 하던 중 선교사들의 활약과 상황의 변화로 1904년 8월에 특사로 석방됐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가족을 돌보며 석방운동을 하던 선교사들의 활동과 기독교에 구국의 희망이 있다는 확신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이만열, 아펜셀러. 연세대출판부, 1985. pp.415-7).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이승만은 이상재, 신흥우, 이원긍, 유성준, 정성만,  박용만 등과 깊은 친분을 가지게 되고, 1904년에는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집필하고 박용만의 협조로 1909년 1월 미국에서 출판했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한국의 자주독립과 발전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서구 정치체제를 배우며 공명정대한 국제협약과 외교를 통해 국제적인 독립보장을 받는 데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1904년 그가 출옥할 때 나라는 이미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당시 조정 내의 유력한 개화적 인물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저들의 밀명이라 할 뜻을 품고 미국으로 유학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한미조약 1조에 명시된 대로 한국이 위기에 봉착할 때 미국이 보호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서, 미국으로 가는 이승만이 미 행정부와 교섭하여 일제의 침략에서 한국을 지켜달라는 청원이었다. 여하튼 상론한대로 이승만은  정치학 공부를 전념하면서 한편 기회되는 한 미국의 지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채 공부만 마치고 6년만에 귀국한 것이다.

    귀국한 이승만은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서울 YMCA) 의 초청으로 청년회 교육과 전도를 전담하는 학생부 간사로 취업했다가 다음 해 황성기독청년회 학관의 교장이 되었다. 동년 일본은 ‘사내 총독 음모미수 사건’(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윤치호 등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국내에 머물기 어려운 이승만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의 평신도  대표로 참석키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대회를 마친 이승만은 호놀루루에 있는 박용만에게 미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그는 하와이 국민회에 이를 고하고 이승만의 초청을 간청했다. 마침내 국민회의 동의를 얻은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 2년여 만인 1913년 2월 27일 호놀루루로 오게 됐다. 박용만은 그가 주필로 있는  ‘신한국보’에 이승만을 아주 높게 칭송하며 다음 같이 소개했다: ”서울에서 일찌기 만민공동회의를 연 민권주의자요, 고종이 임명한 중추원 의원이며, 6년 간이나 옥고를 치룬 애국투사이다. 프린스톤대학의  철학박사인  그는 3월 4일에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우드로 윌슨이 바로 그의 은사이다.” 이런 소개에 감동한 하와이  동포들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으며, 하와이는 이승만의 반일구국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때부터의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선 다음에 재론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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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12 [01:07]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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