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인이 기억할 두 날이 있다. 1902년 1월 13일 한인들이 노동 이민자로 미국의 하와이 섬에 처음 도착한 날이다. 게릭호를 타고 입항, 검역을 마치고 하와이 땅을 밟은 첫 한인들은 93명이었다.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숙원의 이민이 막혀버린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입국한 한인 수는 65차의 선편으로 들어온 6.965명 이었다. 이들은 하와이의 여러 농장으로 나뉘어 뜨거운 뙤약 볕에서 고달픈 농장 노동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응당 기억할 이 날 재미동포들은 2003년 1월 13일을 전후하여 이민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고 미국 정부도 합께 축하해 주었다. 당연하고 경하할 일이었다.
또 하나는 1883년 9월 2일 한미수호조약과 미국의 푸트 주한미국전권공사를 한국에 파송한 답례로서, 고종이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절단을 보내어 이들이 미국의 본토 서부 관문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날이다. 아라빅호를 타고 온 대표 민영익과 전권부대사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원 유길준, 변 수, 최경석, 고영철, 현홍택 등 8명과 2명의 외국인 고문 로우웰, 통역 우리탕 등이 도착하던 날, 미 국무장관 프렐링하이젠은 재무장관에게 사절들을 일급 외국공사의 예우로 무관세통관토록 부탁하였고 항만청엔 미 육군소장 스코필드 장군등이 나와 영접했다. 그리고 미 주요 언론들은 한인사절에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며, 아더 대통력과 미 정계 재계 인사들은 정중하게 환영했다.
아마 이들이 다 귀국했다면 한국정부 사절의 미국방문 정도로 기억될일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어 한국사절의 대표 민영익의 배려와 미국정부의 인준 협조로 사절의 한 젊은 수행원 유길준이 남아 유학하게 되었다. 이어 1885년엔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왔다가 서재필과 서광범은 미국에서 공부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1885년 이후에도 계속하여 이계필, 변수, 윤치호, 박에스더 유학생들과 박정양 공사 일행, 1890년대엔 박희병, 임병구, 이희열, 안정식, 김헌식, 이볌수, 여병현, 이하영, 백상슈, 안창호, 하란사, 김규식, 의친왕 이강. 신성구, 이대위, 1900년대 초반엔 윤병구, 신흥우, 이승만,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 유일한, 박일규, 림두와, 리원익, 강영송, 강영애, 하의식, 송헌주, 임정구, 양주삼 등 한국의 애국애족적인 망명 정치인들과 유학생들이 미국에 입국하여 유학하거나 정착하며 반일구국운동을 펼치며 또한 이 보다 더 많은 상인 약재상 노동자들이 미국에 입국하여 정착하고 활동했다.
바로 이런 1883년 이후의 유학 망명 정치가 등의 선각적인 민족의 지도자들과 1903년의 이민자들이 합류하게 되었기에 재미한인사회는 한측 더 힘있는 동포사회를 이룩하게 되었기에, 이 두 날은 국내외의 한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날들이 된것이다. 그러나 재미사회가 이민 100년만을 기억하는 동한 그 이전 20여년의 민족 선각자들의 역사를 망각하게 되었기에 이제부터라고 우리 선각자들의 정신과 역사를 되찾고 이를 후손과 미국인들에게도 알리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 믿기에, 2008년 9월 2일을 125주년 재미한인의 날로 기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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