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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민 제2호인 서광범의 망명과 영욕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박성모 기사입력  2009/05/03 [01:08]
서광범의 보빙사절 비서관으로서의 서열이나 서채필보다 앞선 1883년 9월2일에 미국에 도착하고  대도시들을 순회하며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면서 귀국하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1년 반여만인 1885년 6월 11일 다시 미국 땅에 돌아온 경위를 생각하면, 서패필보다 먼저  논하는 것이 수순일 듯하다. 그러나 재미사회의 입장에서 서재필 다음로 서광범이 제2호의 미국 시민이 되고 미국에서 세상을 떠나던 1897년 까지 약 12년 정도를 살았던 그를, 이 땅에서 일생을 살며1903년 정식 이민 시기 이후 계속 유입되는 모든 한인들과의 유대와 롤모델이 되던 서재필에 비하면,  서광벙을 서재필 다음으로 논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서광범을 경하게 여김은 아니다. 갑신정변의 대표적 개화파 중에도 서광범은 지위나 나이는 아래일지라도 보수 척사파의 수장 민영익에 버금하는 개화사상의 중추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1859년 5대에 걸친 각료의 가문에서 가난한 서상익의 아들고 태어난 위산 서광범은 1880년에 증광문과의 병과에 급제하고 1882년 한림권점이 된다. 온화 침착하던 그는 유청년 시절부터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며 마침내 김옥균 등과 교분을 나누면서 나라구원의 길이 뒤진 수구 보수가 아니라 개혁 변화의  진보적인 개화에 달려있음을 확신한다. 때 마침 조미조약에 앞서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회되어가는 실상을 좀더 살피려 1881년 12월 일본 국정시찰의 명목으로 조정이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자 서광범과 변수 등이 수행원으로 동행, 이들은 다음 해인 1882년 3월에 일본에 도착하여 명치 이후 서구문명을 배워 놀납게 발전한 일본을 두루 살표보게 됐다.

 그 사이 한국에선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7월에는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척사파들이 일본공사관을 습격하며 이는 청.일군의 서울진주를 초래하고 결국 김옥균 일행의 일본시찰의 목족도 무의미하게 했다. 보수 개화파의 이런 극한의 대결 정황에서나마 조미조약 후 1년여만인 1883년 6월 조정은  조선보빙사를 파미하게 되고, 서광범은 민영익을 수행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교묘하게도 둘로 나뉘어 귀국하는 길에도 서광범은 민영익과 함께 해군함정 트렌톤 Trenton 호를 타고 세계일주항행을 하며 1884년 6월 2일에 귀국 복명했다. 6개월을 수행하던 미해군무관 포크  George C.Foulk 는 후에  캘리포니아대가 출판한 한미관계에서 (George McCune and John Harrison ed. Korean-American Relations, Berkley and Los Angeles: U. of Cal. Press1951, pp105-107) “민영익은 변덕이 심한 심약한 인물”이며, “항상 휴대하던 유학서적만을 탐독하기에 모처럼의 구미 문물의 시찰로 계몽받을 개화의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는 것같다.”고 평했다.  그러나 서광범에 관하여는 “자기 나라에 유익한 문제가 있으면 이를 열심히 노트하며 백과서전의 세계 주요국가의 정치사와 개화사에 관한 정보자료를 많이 번역해주니 이를 소중히 간직하며 귀국했다.” 고 술회했다.

한편 서광범도 귀국 길에 포크에게 한국의 운명이 구미에서 본 개화운동에 있으나 여전히 수구적인 민영익의 보수적 행동노선이 심히 우려된다 토로했다. 그를 중심한 수구파들이 친청사대주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청의 대한 종주권을 반대하는 미국의 고문관 슈펠트의 채용여부를 두고 민영익의 친청수구 척사파와 서광범의 개화파는 노골적으로 대립했었다. 개화파는 청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고 군사와 국력을 배양하여 자주 독립국이 되는 것만이 한국이 사는 길임을 확신했으며 일본은 이런 개화파를 부축이며 저들의 명치 이후의 한국침략의 야욕에 개화파를 이용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 경험이나  일본의 한국침략의 본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안목이 부족한 젊은 개화파들이었기에, 일본을 믿고 거사한 갑신정변을 성사시키고도 청나라의 수구세력의 지원으로 실페하고 만것이다. 새 내각을 수립하고 ‘신정령’을 선포하여 청국 조공과 문벌정치를 폐지하며 인재 관리의 평등한 등용 등을  내세웠으나 비겁한 일본의 배신과 열세로 패배하고 만다. 이런 서광벙 일행이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여러 위협가운데 1885년 6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가 살길이 없어 뿔뿔이 헤어지고, 서광범은 수소문 끝에 한국 선교사의 형 뉴욕의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동부에 가기는 했으나 그 이후의 형편은 풀리지 않고 계속하여 생활고의 나날을 보낸 듯하다.  

나이도 서재필보다 위에 성품마저 내성적이며 사변적이던 서광범은 미국생활 적응이 느리고 미국의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좋은 일 자리도 구하지 못하여 밑바닥 생활을 면치 못했다. 3년 뒤인 1888년 워싱턴 주소록에 소개된 서광범의 직업은 ‘학업’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그 다음 해인 1889년5월 24일에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여 3년만이 1892년 11월 18일에 대심원에서 서재필에 이어 두번 째로 미국 신민권을 부여 받았다. 시민권을 받은 다음 해 1894년에야 겨우 노동을 면한 ‘교육국 서기’가 된 것을 보면 그의 시민권 신청은 좀더 나은 취직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서재필과 달리 영어 이름도 없이 한국명의 영어 표기만으로 시민된 이름으로 사용하고  상당한 보수를 받는 월급쟁이가 애제자 겨우 된 것이다. 그러나 놀랍고도 재미동포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일은 이토록 미 하류층의 어려운 생활을 하던 서광범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도 못하고 한글로 쓴 한편의 글도 없었음에고 1891한국의 정황과 교육에 관한 “조선 교육론” Education in Korea영어논문을 써 미국의 정부간행물에 게재한 사실이다. (The Comprehensive Indexto the Publications of the U>S> Government, 1881-1893, Vol.I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05)  이 논문을 통한 한국의 종합적인 소개의 내용은 뒤에 재론하겠으나, 우선 빈민가를 헤매며 정착하지 못해 처절한 생활을 하던  그가 한국에 관한 영어 논문을 써 미국정부의 출판물에 발표한 사실은 미국과 재미한인사회 그리고 그 후예들에게 기념비적인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어느 재미학자는 한국의 개화사상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미국의 하층을 헤매이며 고생한들 지금은 물론 백년 뒤에 누구 하나 기억이나 할 것인가고 한탄했으나, 이는 역사의 이치를 모르는 소치였다. 그후 100수십년이 지난 오늘 125년사를 살피는 필자가 그의 이 귀한 노고를 발국하여, 국내외 한인과 그 후손들에게 전하려 하기에 감회가 크다. 재미동포나 훙예들이 이런 선각의 훌륭한 재미 선배들을 본받아 계속하여 우리의 정신과 역사 문화를 국제적인 언어가 된 영문으로 기록하여 만방에 펼칠 수있기를 기원한다.
 

서광범은 겨우 2년 교육부 서기로서 월급생활을 하다가 해고되고 막일을 하다가 인도 ‘신지학회’ Theosophical Society 관리인으로 취직했다. 그곳의 도서관에 딸린 작은 방에 기거하며 호구지책을 유지하다가 영양실조로 폐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 1894년 청일정쟁이 발발하던 10여년 동안 한국은 청의 한반도 지배기간이었으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저들의 정한론의 계획대로 다시 한국을 저들 마음대로 요리하면서 친일의 김홍집 내각을 조직했다.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1894년 외무대신 김윤식을 통해 미국망명의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사면 재기용하도록 하고 특히 심히 고생하던 서광범은 여비까지 제공하며 귀국을 종용했다. 1984년 9월6일 주미일본공사는 망명중인 서광범 서재필의 귀국조치를 알렸으나 서재필은 의학수련의 이유로 거절하고, 서광범은 즉각 동의하고 몬타나에 거주하던 신응희 정란교와 함께 귀국의 뜻을 밝혔다. 아마도 심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일본의 극진한 예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상항을 떠나기 직전 귀국소감을 묻는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늘에도 이해하기 힘든 일본관을 말했다. 그가 일찍 일본을 의지하여 개화를 시도하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0여년 뒤에도 잊지 않고 저들을 사면하고 재중용하도록 압력을 가한 일본의 노력에 과대 보은의 뜻에서인지 혹은 일본의 한국침략의 음모를 그때까지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선인지 구별하기는 어려우나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문명을 전파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러나 청은 그 반대의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다.”(New York Times 9/14/1894 일자)는 발언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왜정의 한국침략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이런 일본관 내지   일본 침략전에 대한 언급은 서광범의 일본이해나 정한론에 대한 잘봇된 이해의 발언이었다. 갑신정변 때 왜정을 믿도 거사했다가 저들의 배신으로 실패한 경험이 있었습에도 아직도 일본이 정한론의 대계책 속에서 먼저 청국을 한국에서 축출하고 한국을 침략하려는 음모에서 진행되는 청일전쟁이었으나 미국에서 10여넌의 망명생활을 했음에도 아직도 서광범이 이런 친일적인 발언을 하고 있기에 그 저의가 의심스럽고 혼돈스럽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일본이해인지 아니면 일본에게 질 보이기위한 아첨의 친일적인 발언지 활언키는 어려우나 후자늬 경우같이 여겨진다. 그 어느 쪽의 발언이든 그의 개화사상이나 일본관, 정치이념이나 세계정세 판단, 혹은 그의 인격이 아직도 30대 애국청년의 미숙하거나 오전하지 못한 인티그리티의 약점에서 온 소치라 보아야 할지 모르겠댜, 여하튼 이는 서광벙의 어두운 다른 면이다
 

여하튼 서광범은 1894년 9월 15일 상항을 떠나 일단 일본 요꼬하마에 갔다가 동년 12월 9일 조정의 사면령을 받고 헌국으로 떠나 1894년 서울에 도착했다. 뿐아니라 일본정부의 끈질긴 압력으로 서광범은 김홍집 새 내각의 법무대신으로 임명되기에 그는 미국 시민으로 정부각료가 된 최초의 대신이기도 하다.  부임 즉시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래 품고있던 개혁의지나 미국에서 보고 배운 민주적이고 발전된 여러 제도나 시책들을 실천할 기회를 가지게 됐다. 먼저 사법제도와 행형제도의 개혁,  능지처참제도를 금하고 교수형 제도,  재판업무의 근대화, 살인외의 사형제도 금지, 기독교선교의 허용 등 다 그의 큰 업적이었다. 그러나 한말 조정의 정치적 갈등이 심각해지고 친일파와 친로파 세력의 대립이 첨예화 되면서 법무대신이던 서광범의 입지 처신이나 업무수행은 또다시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특히 민비를 중심한 민씨사대당이 친일의 내각을 분쇄하려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려 했을지라도 친일내각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있는 조정에서 일본공사 마우라가 일본의 자객들을 동원하여 1895년 8월20일 민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니, 이를 어찌 보아야 할것인가? 그 어떤 구실이나 변명도 용납될 수 없는 한민족의 비극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이틀 뒤인 8월22일에는 소위 법무대신의 책무소흘의 사죄나 조의, 해명이나 진상조사의 보고는 고사하고 온 나라가 비통하여 통곡하는 백성들에게 비극을 당한 국모 민비의 국장계획이 아니라 패서인한다는 법무대신 서광범의 서명한 문서를 발표했다. 백성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하는 것이었는가? 아무리 국운이 기운 국가라 할지라도 일본 비밀의 정치깡패들의 궁정 깊은 내실에서의  왕비와 시녀들의 잔인한 살상은 용서될 수 없는 만행이었고 서광범은 또한번 최대의 민족적 과오를 벙한 것이었다. 확실히 민비시해와 그 이후 일본의 조정과 궁정 안팎에서의 오만방자한 언동들은 한국의 임금이나 백성 모두를 멸시하는 처사요 도전이었다. 민비시해 사건에 얼마나한 직간접의 연관이 있는 여부를 가리기는 어려울지라도 법무대신 서광범의 서명으로 국모를 페서인한다는 발표는 씻을 수 없는 그의 죄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민비시해 직후부터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과  러시아 공사 웨베르 K. Warber 는 ‘페서인 조작’뿐 아니라 서광범이 ‘공범자’라고 주장했고 미국공사 실 John M.B. Sill도 알렌 주징에 동조했다.  여하튼 서광범은 혐의를 벗을 도리가 없었고 시해 4일 뒤인  8월25일에는 범부대신을 사임하고 학부대신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서광범은 한국으로부터의 도피를 기도하여 주미공사를 희망하여 1895년 10월 25일 임명받고 미국으로 떠나 1896년 2월 19일 클리브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니, 이는 미국을 떠난 뒤 불과 1년반여 만에 또다시 제2의 망명 길에 오른 셈이었다. 이 마저도 한국의 아관파천으로 임금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고 총리 김홍집이 피살되고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서광범은 불과 4개월 만인1896년 6월10일에 해임되고, 친로파인 이법진이 동년 9월 12일에 새 정부의 주미공사로 부임했다. 친러의 새 조정은 서광범의 주미공사직을 해임하고 ‘중추원일등의관’에 임명했으나 한국의 정치기반을 상실하고 더욱이 왜정의 민비시해와 관련이 있는 혐의를 받고있는 처지로 더 이상 귀국하기를 원치않아 또다시 정치망명을 결심한 것이다. 이러한 서광범은 자신의 장래에 대한 불안과 정신적 충격으로 그의 지병이던 폐결핵이 악화되어 결국   1897년 8월13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망명한 미국 땅에서 한국 공사관 서기 신성구, 이의담, 서병규, 박승봉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조국 근대화와 백성들을 일깨우러던 그의 젊은 날의 열정은 훌륭했고 미국의 고생스런 망명생활 속에서 한국의 정세와 교육에 관한 영문 논문을 미 정계 언론에  발표하는 등의 큰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말년의 칱일발언이나 민비시해사건 연루설 등은 그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그가 별세하자 뉴욕타임스 (1897/8/13)는 이를 톱기사로 보도하며 그 다음 날에 계속된 서광벙의 기사 (8/14)에서도 그의 고매한 인품과 어려운 생활고가 지병을 악화시켰다며 애석해 했다. “그는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극도의 곤궁한 생활이 결국 치명적인 폐걸핵 발병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열악한 황경에서도 그는 공사관의 공관원처럼  옷차림은 언제나 단정하고 산뜻했다. 그를 잘아는 지인들조차 그에게서는 가벼운 말이나 불평불만을 듣지 못했다 한다. 그의 조용하고 온화하며 위엄스런 성품, 사상과 행동에 나타난 정중한 예의범절, 천성적인 청념성 등은 분명히 그의 가문이 귀족이었음을 대변해 준다”고 절찬만 하며 그의 말년 친일반청 반한적인 언동이나 국내에서의 과오 협의에 대해선는 업급하지 않았다. 서광벙은 화장을 원했고 그의 장례는 신지학회장 카핀  George M. Coffin이 주관하며 당시 유학하여 와 있던 의화군 이강과 한국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서광범의 장례에 관해 ‘뉴욕트리뷴’  New York Reibune (1897/ 8/16)지를 위시한 대부분의 미국언론들은 보도하면서 그의 “괸위에 킁 성조기가 덮여 있고 그 위에 평소 입던 그의 관복이 걸쳐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약소 국가에 새로운 미국문명을 도입하려 했으나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영욕의 자취를 남긴체 일찔 떠나는 서광범의 애절한 모습을 잘 나타내는 인상이었다.


서광범의 유산처리에 있어 그의 말년에 구한 미국의 집 한채가 반일친로파인 새 재미한국공사 이범진의 제기로 복잡하고 서광범이 미국 시민이었기에 비미국인 부인에게 유증할 수 없는 미국법이었기에 난처한  처지였으나, 미국의 모간  Morgan 상원의원은 미 상원에 서광범의 상속인을 구제하는 법안 (1897/12/13, S.2764)을 상정 통과하여 특별법 조치로 서광범이 미국시민이나 한국국적의 여인과 결혼했기에 과부된 그 부인이 상속할 자격이 있다고 결정했다. ( Fifty Fifth Congress, 2nd Session, Congressional Recorc, Senate, Vol.31, pt.1, 1897/12/16, ‘Estate of Pom K. Soh’).  이어 이범진의 재심청구 소송이 있었으나 미 상하의원은  검토 후 1898년 3월 18일 최종적인 법한 통과로 처리했다. (‘구한국외교문서’ 권11, 미국 안 2, pp.487-489).  이에 부채를 청산한 미화 $500달러를 프래이저 총영사에게 위탁하고 이를 알레공사를 통해 서광범의 부인에게 전달했다 하니 당시 미국 정계의 한국의 한 정치망명객에게 대한 예우는 퍽이나 정중했던 것같다.

 
서광범의 미국의 집 한채를 빼스려던 친로조정이었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한국을 통채로 삼키고 아직 한일합방의 조인만 남긴 일본의 꼭뚜각시 같은 대한제국이 1910년 7월 서광벙에게 ‘익현’이란 시호를 내리며 다음 같이 증시하니 서광범의 영욕스런 한생이 한말 조국의 영욕스런 비운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프기까지 하다. 그가 운명하던 한국의 친러정권의 반서광범 정서와는 달리 이제는 친일정권이 증시하는 어구이기에 명쾌치는 못하나 서광범의 밝은 액면을 보는 것같기에 그의 영욕을 기리는 의미에서 옳겨 본다:  “고 학부대신 서광범은 천자가 다량하고 일찍이 개명의 뜻을 폼고 있더니 갑신정변을 만나 해외로 망명 표백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계기로 양부-법부와 학부대신에 기용되어 신정에 협찬한 바 있다. 그후 미주로 거너가 주미특명전권공사 임무를 수행 공적이 많았으나, 복명하지 못하고 불행이도 장서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가슴아픈 일이다. 아직까지 포휼의 거다 없음은 결례되는 일이다.” (‘공종순종실록’ 하,  p. 551) 이 모든 서광범의 얼룩진 짫은 생이 한국과 그의 망명지 미국 땅에서 벌어젔기에 재미한인사회는 더 잊지  못한다. 서광범의 열정적인 개화사상과 국민 개몽교육이나 애국심은 본받되 그의 잘못된 역사이해나  친일반민족적인  언설거동은 결코 본받을 수 없는 경계의 거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서광범이 미국의 망명생활과 그후 주미공사로 있으면서 한국을 미국 정부문서에 소개한 영어 논문 ‘한국의 교육론’이나 재미한인유학생들의 지원은 귀한 공헌이었기에, 먼저 유학생 후원을 살피고 끝으로 ‘한국의 교육론’을  일별하면선 글을 마치려 한다. 공사 시절 일본의 100여명 유학생 중에 이범수, 안정식, 임병구, 여병현,  김헌식, 이하영, 이희철, 박희병, 서병규, 현동식 등 10여명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와 도움을 청하자, 서광범은 2천여불을 차용하여 학자금으로 융자하며 자신의 사재를 더해 이들을  하워드대학 Howard U.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해 주며, 이완용 외부대신에게는 이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897년까지 재미한인유학생은 약 21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다. (규장각도셔 ‘주미래객’ 1권 ‘보고 제13호 조선미국유학생 21명’). 뿐아니라 스미스의 ‘서광범의 미숀’(Smith, The Mission of Pom K. Soh) 이나 ‘인디펜덴트’The Independent ( 1897/ 9월 4일자) 지에 따르면 서광범은 이들 유학생의 일부를 영국의 할리 대학  Harley Colleged 에까지 입학을 주선하여 주었다 하니, 이는 그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젊은 유학생들이 서구문명을 배워 나라의 장래의 동량이 되게하려는 그의 애국적 열정의 일환이었다고 하겠다.

 
그의 ‘한국의 교육론’은 지금부터 벌써 일백 십수년 전인1891년에 한국의 교육만이 아니라 한말의 정황을  영문으로 미국 사회에  전해주는 것이었기에 참으로 값진 논문이었다. 불어로도 번역되어 프랑스 할술지에 발표된 이 논문은 어찌보면 1883년 보빙사절이 미국을 다녀간 후 한국인이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엒지 한국을 일찍이 소개한 가장 귀한 자료라 해도 관언이 아닐 정도같다. 아마도 재미사회의 대선각의 서광범을 떠올릴 때 이 영문논문이 먼저 떠오르며 그의 다른 과오를 잊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다. 이제 끝으로 그 대의만이라도 살피며 그의 미국 망명의 영욕의 삶을 마무리 하려 한다.     

<박성모 /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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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03 [01:08]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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