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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선' 보다 먼저 온 이민자들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박성모 기사입력  2009/05/03 [00:50]
한인들의 미국정규 이민 직전후 시기에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 본토에 도착한 여러 계층의 한인들이 어떻게  샌프란시스코에서  L.A. 와 내륙으로 들어가며 정착하고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에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던가를 간편하게 나마 살피려 한다. 유색인의 인종차별 특히 당시 중국인과 일본인 등의 동양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법과 선입감이 극심하던 때였기에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본토 대륙에 발을 디디며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천하고 힘든 노동뿐이었기에  뜨겁고 어려운 하와이 농장의 노예 같은 삶이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지참금도 없이 주로 신대륙에서 영세 상인이나 약재상 혹은 유학생의 신분으로 온 자들이었기에 미 본토에선 단순 노동자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문명하고 잘 산다는 미국의 밑마닥에서 가난하고 천대를 받으며 호구지책의 감당도 어려울 지경이었기에, 한 동포에 대한 공생 공존의 의식을 가지며 화목하게 살 생각의 여지도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슬럼가의 복판에서 남루한 복장에 상투를 튼 동족끼리 머리 채를 붙들고 싸우는 꼴을 미국인들이 닭싸움을 보듯 흥미롭게 둘러서 구경했다는 일화도 이런 우리의 처지를 여실히 들어내는 한 단면이었다. 때문에  비참한 자신의 신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체, 다만 생존을 위해 가난하고 불쌍한 동포들끼리 위하고 협조하기 보다는 토굴같은 슬럼가에서 감정을 터트리고 다투면서 겨우 연명하며 생존하고 있었다.   

   1883년 한국의 보빙사절이 미국 본토를 방문한 이후 정규 이민이 시작되던 1903년까지 미 대륙을  방문하거나 이입된 한인들은 벌써 상당수에 이른다. 동양인의 미 입국 관문이던 샌프란시스코 항만청의 기록에 의하면, 사절 방문 이후 공식 비공식으로 방문하거나 상업 유학 등의 명목으로 미 본토에 들어 온 한인들은 200여명이나 된다. 연도별로 보면 1894년 김신도 외 3명, 1895년 박에스더 외 4명, 1896년 김태준 외 8명을 비롯하여 매해 10여 명씩 증가하여 이민 직전인 1902년까지는 102명이나 되었고, 이민기 1903년부터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방이 되던  1909년까지 64명으로 본토 이주 한인은 218이나 되었다.

이들을 항만청에 밝힌 업종별로 나누어 보면 장태천 등의 약재상이 71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황모항 등의 학생과  그 가족이 27명이요, 셋쩨는 감실원 등의 인삼판매인 22명, 넷째는 김신도 등의 상인 18명이다. 그 다음은 선교사 이조심, 하인 장상호, 이름 미상의 정부관리 각 2명씩이며, 남어지 요리사 박재유, 사무원 원개각 각 1명과 기타 몇명 등오로 나뉜다.

  이들 외에도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이민 노당자들이 1905년부터 다시 대륙철도회사 (The Great Northern Railway) 의 고용에 따라 미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동년에 400명, 1906년에 450명, 1907년에 150여명이 가주로 이주하여 불과 3년에만에 1,000여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미 본토엔 샌프란시스코에 직접 들어온 한인과 하와이에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한인들을 합하며 1,200여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취세는 계속되려는 분위기였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행정명령 589호를 긴급하게 발표하여 한인과 일본인의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게 되었기에 잠정적으로 대륙에의 유입은 중지된 상태였다.  (+ SF Chart)

     그러나 이 때는 인종차별 특히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이 가장 심한 때여서 한인들도 이런 차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1882년에 중국인 배제법 ( The Chinese Exclusion Law)을 제정하고 1892년, 1902년 등 매 10년마다 재개정하여 중국인에게 적용하며 중국인에겐 시민권을 주지 안했다. 1913년에는 가주 외국인 토지법  (California Alien Land Law )을 추가로 만들어 동양인은 땅도 집도 소유하지 못하게 금하고, 땅의 임대도 3년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이는 일본인이 농사를 잘 해  백인의 농업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법으로 당시 세크라맨토 지역에서 농사를 하던 한인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다. 또한 1924년에는 동양인 배제 법령 (Oriental Exclusion Act)을 제정하여 시민권과 소유권을 박탈하며 강화하기에 실로 이런 차별 악법을 극복하며 생존하기란 심히 어려운 때였다.

   이러한 당시의 샌프란시스코의 인종차별과 동양인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환경 속에 유입되는 한인의 생활은 하와이의 한인의 어려움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하와이에서의 사탕농장의 힘든 노역 대신 샌프란시스코와 대륙에선 식당의 쿡이나 잡일과 미국 가정에서 하우스보이 같은 집안 일들을 주로 했다. 이토록 어려운 처지에서 고생하며 살면서도 인삼상이나 학생들 끼리 집에 돌아오면 술에 취해, 상투를 튼 상인들과 머리를 깍은 학생들은 서로 상대방을 ‘상투’와 ‘깍아대기’라 조롱하며 싸우기 일수였다’ 특히 상항지역이 대륙에서 인종차별이 가정 심했기 때문에 이곳의 한인들 생활은 더 처절했다. 때문에 한인들은 가능하면 이곳을 떠나  로스엔젤레스나 콜로라도의 덴버, 네브라스카의 린컨, 헤이팅스 등 내륙으로 진출하여 갔다. 이들은  농장, 철도건설 노동을 하고 도시에서는 식당 보이, 고용살이, 여인숙, 세탁소 등을 운영하며 살았다. (샌프랄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거서, PP.45-47)

이러한 동포들이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L.A.  등지에 흩어져 초라하게 살고 있을 때에, 독립 운동가요 독실한 기독자로 한국에서도 이미 민족 지도자로서의 명성이 높던 도산 안창호가 1902년 10월 14일 그의 아내 이해련과 함께 유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시가를 거닐던 안창호는 미국인들에 둘러쌓인채 남루한 복장을 한 한인들이 상투를 붙들고 싸우던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이러한 동포들의 참상을 보며 곧  유학을 포기하고 동포들의 생활개선과 화합을 위해 나서게 된 것이다.

   신성려가 ‘하와이민약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간, 1988)에서 하와이와 본토 대륙의 여러 층의 한인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며 당시 그들이 친히 체험한 바를 증언한 생생한 몇 사례글 들어보자.  본토에서의 노동이나 하와이 농장에서 노역할 것 없이 그들의 삶은 참으로 차별적이며 짐승만도 못한 여건 속에서 처참한 것이었다. 1905년 하와이에 왔다가  1906년 본토에 건너온 백광선 노인 경험담의 요지를  들어보자. 그 차별천대와 이민노동자의 한 많은 삶의 증언은 바로 엇그제 당한 우리 어버이의 이야기 같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하와이까지의 뱃삭이 무료라던 소리는 거짓이었다.” 돈도 의복도 직장도 없이 우리 10세대는 매일  저녁까지 사탕수수 볕에서 노동을 하다 1년 후는 계약을 끝내고 가주 리버사이드로 가려고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그 때 백인이 다리로 어머니 치마를 올리며 또한 나의 억굴엔 침을 뱉았다. 나는 놀라 “아버지 왜 이런 곳에 왔느냐 한국으로 돌아가요”라며 울었다. 아버지는 손목을 잡으며 “나중에 이야기 해줄께”라며 아무런 항변도 못하며 그 백인을 떠났다. 본토에 내리는 순간부터 “더러운 칭크”라 멸시했다. 다만 오랜지 레몬 호도 따는 일만 허락됐다. 백인들은 중국인과 한인의 분간도 못하며 그저 김치 마늘 고추장 땀 냄새가 난다며 차별이다.

    동양인은 백인 사는 데서는 못 살게 했기에 살곳은 제일 시끄러운 철로 근처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실은 1805년 중국 노당자들이 살며 닭치던 곳을 수리해서 살기에 집같지도 않았고 이불도 없이  검불을 집어다 잠자리를 만들어 짐승들 모양으로 살아야 했다. 포대자루로 만든 옷을 걸치고 학교에 갔기에 애들이 늘 놀리기에 학교 가기를 꺼렸다. 먹을 것이 여의치 않아 소 돼지 도살장을  찾아 버리는 내장을 달라고 사정했다. 한인과 멕시코인들이 가면 “버리는 내장을 사람이 먹느냐” 놀리며 주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 주듯 던졌지요.” 백인들은 “우리를 짐승으로 보았죠” “밖에서는 화장실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고 학교에선 화장실을 쓸 수는  있었으나 애들이 놀리는 것이 싫었지요.” 영화관에 가면 뒷자리에 앉아야 하고 보이지 않아 빈 앞자리로 가려해도 허락지 않았다.

    스탁톤에선 감자 농사를 열심으로 하여 많은 수확을 냈으나 아무도 사주지를 안하기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일자리을 찾아 떠도리같이 자주 이사다녀야 했던 우리가 이번에는 광산촌오로 일자라를 찾아 갔지요, 기껏 얻은 일이란   사람을 죽이는 중독가스실에서 일하는 것이었고 아무리 개선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 짐승같은 한인 노동자의   건강이란 안중에도 없었다. 동생 어니스트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매일같이 백인 애들한테 매를 맞고 물벼락을 맞아도 학교에선 아무런 대책도 안해주었다. 한인이기에 당연히 받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지요.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백광선 여사는 당시 76세 였으며 1905년 부모를 따라 사탕수수 밭에 도착했을 때는 5살이었단다. “부모님 한테 배운 것”에 관해 마지막 질문을 하자 “한국정신이지요. 미국시민이지만…고생을 하면서도 누구를 비난하지 않고요. 지금 매우 고맙게 생각해요.”라 대답했다. ( 신성려, 상기서,  pp.153-160)

    본토에서 사는 한인 대부분이 어떤 신분으로 왔던 상기의 회고와 별 다름 없는 가난과 차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살았다. 아니 산다기보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어떤  백인들의 천대에도 굴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1905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인터뷰 하던 1976년엔 88세던 하상옥과 1914년에 도미하여 당시 80세던 부부 노인들의 한 두가지 다른 증언들만 더 들어보자.

      상기 노인들의 증언자들과 큰차이가 없으나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보고“쨉”이라며 돌매질을 당하며 이발소에서의 천대받고 자녀교육위한 노력의 회고는 좀 새롭기에 추가한다: “내가 처음 왔을 때 동양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아주 심했었어. 새크라멘토에서 당했지만 백인들이 우리를 보면 돌을 던졌으니까. 동양인은 누구나 “쨈”이라 불렀었어. 지금 생각하면 미국사람들이 너무 했지만 이제는 좀 개선 됐지. 그때는 식당같은 데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으니까. 또 호텔 이발소도 마찬가지고요…영화관도 무서워서 갈 생각도 못했어. 캄캄한데 때릴까봐. 이발소에서는 절반만 깍가준 일도 있고….여러 해를 죽도록   일하고 사업을 해봐도 “어떤 때는 주머니 속에 동전 한푼도 없어서 빵 살 돈이 없어 며칠뒤 싸구려 빵을 먹으면서 애들의 학비를 댔어…”

     “소정이가 쥴리아드에 있을 때는 참으로 어려웠어. 돈이 없으니까, 애들 의복은 내가 만들었지. 구두 살 돈이 있어야지. 남의 것을 잘라 신기도 하고. 한번은 ‘차이나타운’에서 애국부인회가 황옥석씨의 환영회를 하는데 가던 도중에 내 구두바닥이 떨어지지 않아. 얼마나 창피스러웠던지. 그래도 애들의 교육을 위해서 조금도 부끄럼 없이 일했어. 희생없이 되는게 있나? …” 어떤 신분으로 미국에 왔던 그들 대부분은 이들과 같이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미국인의 인종차별 속에서 이중적인 고통을 겪으며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 신성려, 상기서,  pp. 179-187)

    1905년 하와이로 이민왔다가 다음 해 샌프란시시코 의 대륙으로 옮겨온 백명선의 회고 증언에선 한층 무서운 공포까지 느껴진다. 그의 부친 백신규는 언더우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친 기독교 집안의 장자였다. 백명선이 실제로 목도한 사실 중엔 백인들이 중국인들을 마음대로 아무런 죄도 없이 마구 총질을 하여 살해해도 아무렇지 않고 경찰에 고발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증언이다. “미국의 ‘웨스턴 무비’를 보면 짐작하지요. 총가지고 사람 사냥하는 것, 그런데 동양사람은 죽여도 살인조도 아니었어요. 술취한 것들이 총을 빼가지고 지나가는 애매한 동양인을 쏜 일이 수도룩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고발도 못 했지요. 우리는 소 말 취급 이하였어요.”(시성려, 상기서,  p.150)

    미국 본토로 직접 왔던 하와이 이민으로 왔다가 샌프란시스코의 대륙으로 이주했던 초기 우리 한인 상인 유학생 망명객 할 것 없이 그들이 미국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차별을 받으며 이 땅에 정착하고 생존하여 살아가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여러 계층의 당시의 한인들의 차별의 경험과 생존의 고초는 누구나 다 당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재미한인 조상들은 절망하지 않고 배운자나 못배운자의 차별이 없이 거뜬히 이기고 굳굳하게 살아왔기에 대견하고 자부스럽다.            

<박성모/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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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03 [00:50]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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