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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사회 어제 오늘
구한말의 개화 크리스찬 윤치호의 미국 망명 유학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기사입력: 2009/05/03 [00:29]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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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모
   
개회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부친 윤응렬의 영향으로 유소년 시절 유교교육과 함께 개화사상가들에게 교육을 받으머 교분을 가지고 성장한 윤치호는 17세되던 1881년 1월 신문물제도를 시찰하려 일본으로 떠나는 ‘신사유람단’의 최연소자로 수행게 된다. 시찰단의 귀국 후에도 윤치호는 계속 동경에 머물러 유학하며 신학문과 며 일어 영어 등의 공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때 마침 한국 최초의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하는 프트는 동경에 머물러 있는 동안 윤치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그는 한국으로 떠나면서 적합한 통역자가 없어 아직 영어가 부족한 윤치호지만 그를 강권하여 통역 보조인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의 프트 공사와의 통역으로의 인연은  미국공사공사관과 유대관계를 원하는 고종에게 자유로이 접견할 수 있게 된다. 뿐아니라 그는 청.일의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며 한말 조정의 관리들 특히 개화파 주역들과  자주 접하면선 세계 정세에 눈뜨고 한국의 개화와 독립의 절실함을 느끼며 고종황제에게도 자주 이러하 뜻과 정보를 상신했다.
 
개화당의 갑신정변 계획을 대략적으로 알게 된 윤치호 부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자제의 의견을 비쳤기에 그들에게는 구체적 정보를 주지 않았기에 상세한 일정을 몰랐다가 당일의 현장에서 알게 되었으나, 평시 그들이 개화당 인사들과 친밀했기에 정변 공모자들로 보수관료들의 의심을 받았다. 윤치호의 1884년 12월7일의 ‘일기’에 의하면 그가 프트 공사와 함께 청의 원세개 진영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알현했을 때 “나는 너희 부자가 죄 없음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고종의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은 계속되었기에 국왕의 해외 망명 유학의 허락을 친필로 받고 미국 유학은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평소 적대감을 가지기도 한 청국으로 유학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되던 1885년 1월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인천을 출발 일본 나가가기를 경유  1월 23일 상해에 도착한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 Young J. Allen 이 세운 ‘중서서원 대학’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한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2년간 근대교육을 받은 경험이 았으나 아직 산발적이었으며 체계적인 근대교옥은 4년 여년에 걸친 중서서원에서의 배움이었다. 그는 인문 사회과목과 성경, 영어 중국어 등 고루 공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댜. 그 밖의 과외활동이나 대인관계에도 열심이었으며  독서도 ‘미국사’ ‘프랑스사’ ‘문명제국약시’ ‘무국책’ 등과 문명개화에 관계된 서적들 뿐아니라 섹스피어 등의 세계 문학 등까지 폭 넓게 탐독했다.

 

무엇보다 상해 중서서윈에서의 유학기간에 윤치호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신학문 못지 않게 그가 이곳에서 기독교에 접하게 된 사실이다. 그는 성경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학서적과 고전 등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교회의 예배와 여러 집회에고 열심으로 참석했다. 여러 기독자들을 사귀던 그는 특히 선교사 알렌  Y. J. Allen 에 대해 “자신은 복음 안에서 그의 아들”이라 했고, 보넬은 “자기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직접적인 안내자”라 고백했다. 4년 여의 기독교 연구와 수련 끝에 그는 크리스천이 되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1887년 4월3일 세례를 받았다. 그의 기독교 수용은 그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자신의 생만이 아니라 위기의 한말을 구하는 길도 다만 이 기독교의 정신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4년 여나 중국에서 망명 유학을 하던 윤치호는 그의 경험을 통해 중국에 대해선 아직도 그들이 야만적이고 미개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청이  서구 강대국들에게는 굴종하면서 한국을 속국으로 취급하며 방자하게 구는 일에 대해선 여전하 분노했다. 그는 한국이 청국의 보호로 나라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은 것을 개탄하며 청국은 그럴만한 능려도 없으며 한국의 개화발전에 방해자로 간주한다. 더 일찍 일본을 시찰하고 공부한 윤치호에게 미개한 청국보다는 차라리 서구군명을 본받아 놀랍게 발전하는 일본에서 본받으며 배울 것이 많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열강의 침략에서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권을 확립하며, 정치를 쇄신하고 내정을 개혁하며, 개화제국의 모델을 본받아 문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에게는 일본도 개화발전국의 하나로 비췄기에 아직 24세의 젊은 윤치호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청국보다는 차라리 일본이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같다.

여하튼 바로 이런 사상과 고민을 지닌 윤치호가 보넬 교수, 알렌 박사와 감리교의 후원으로 1888년 9월 상해를 떠나 일본을 경유, 동년 11월 8일 열망하던 미국 테네시주의 내쉬빌에 도착하여 명문 벤더빌트대학에 입학한다. 즉 이는 명치 이후 서구문명을 본받아 발전한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배움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대표적인 미국에서 그가 직접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윤치호에게 붙는 ‘망명’의 이름은 좀 특이하다. 그가 개화사상은 가졌으나 갑신정변에 직접적인 가담은 아니 하였고 고종황제도 그의 죄 없음을 확언까지 해주었다. 또한 윤치호의 유학은 비록 친청조정이 그를 정변 역적들과 같은 친일성향의 개화파 무리라 하여 죽이려는 위협 속에서 나라를 떠나 유학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왕이 친히 그의 해외 유학에 대해 친필로 “지도 知導”라 써주며 ‘알았다, 승낙한다’며  제가하였다. 또한 그가1888년 망명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을 때에는 상당한 영어 실력이 있고 상해의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중서서원 대학’에서 기초적인 미국대학과 대학원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기에 방학이나 유학생활 속에서 미국 전역을 한국의 정황과 구원의 길이나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하며 순회까지 할 정도였기에 ‘특별한 망명 유학생’이요, 이런 그의 5년여의 미국에서의 학업과 활동은 재미후손들에게 본받을 또하나의 귀감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시각에서 그의 미국에서의 망명 유학생의 생활을 좀더 살펴보자.

1888년 10월 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상선 아라빅  Arabic 호를 타고 하와이에 잠시 정박하고 내리지도 못한 채 출발하여 19일만인 1888년 10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시에는 배멀비로 상당한 고생을 했던 것같다. 그러나 상해 중서서원의 알렌 선교사의 소개를 받은 하논 목사  Reverend Hannon의 도움으로 상항의 코스모포리탄 호텔에 머문 후 곧바로 기차료 $48달라65전의 테네시행 기차를 타고 7개주를 거치며 8일간 5차나 기차를 갈아타며 상항을 떠나 리노, 덴버, 켄자스시티, 센트루이스를 지나 내쉬빌에 11월 4일 도착한다. 도중 미조리 주 캔자스 시티의 호텔에 유숙하려 하다가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거절을 당하고 역에서 밤을 세우기도 한다. 당시 중국인 제거법이 미의회에서 제정될 정도였기에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할 것 없이 결국 황인종으로 차별을 받은 것이기에 그는 벌써 유색인의 인종차별의 쓴맛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에 능숙한 그는 당시 클리브랜드 대통령 ( 제22대)의 임기가 끝날 쯔음 새 공화당의 도전자  해리슨  Bejamin Harrison (제 23대)이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들으며 참으로 놀라고 감탄한다. 한국의 세습적인 절대 황제나 청나라의 왕정 속에 살던 그에게는 절대 권력자를 백성들이 자유스런 직접 선거로 선택한다는 것이기에 참으로 기절초풍할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민주주의와 민선의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나 토론을 처음 보고 듣는 것이기에 놀라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윤치호가 늘 쓰던 당시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먼저 내쉬빌의 도시나 벤더빌트 대학 캠퍼스가 놀랄만큼 아름다울 뿐아니라 대학의 규모나 교육내용이 전혀 새로웠다. 그리고 영어에 큰 지장이 없는 그였기에 공부와 대학의 그룹참여, 교회와 사회의 각가지 활동에도 자유스럽고 폭 넓게 참여했다. 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윤치화가 3년의 벤더빌트에서 택한 과목들은 교회사 네 학기, 연설학 세 학기, 성경사, 설교학, 논리학 두 학기 등을 중심으로 하되 로마사, 심리학, 설교사, 교회정치, 수신, 화학과 조직신학 등 다양한 과목들을 두루 택했다. 그는 여러 과목에소 수석을 하고, 그의 ‘조직신학’의 답안지가 ‘웨슬리언 애드보케이트 Wesleyan Advocate’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그의 신학이나 사고, 영어 등이 특출했던 것같다. 그의 계속된 2 년 동안의 죠지아 주의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에서의 공부는 벤더빌트에서 택하지 않은 과목들을 더 선택했다. 어떤 관목이나 분야의 전문성보다는 미국에서 발달된 여러 분야들을 고루 배우려 했던 것같다. 따라서 에모리에서는 대부분 물리 화학 식물학 대수학  기하학 등의 자연과학 과목들과 역사 헌법사 정치경제학 자연지리학 등의 인문사회 과목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인문 사회 자연 과학의 제분야의 과목들을 다같이 큰 지장없이 우수하게 공부한 것을 보면 윤치호는 퍽 댜재다능 할뿐 아니라 선진국의 발전된 제분야에 대해 배우고 알려는 열정이 컸던 것같다. 이런 그의 재능과 열정을 본 에모리대 총장 캔들러 Warren A. Candler박사는 윤치호가 장차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다. (‘일기’ 1892/10/14일자 참조)

미국 5년여의 유학기 동안,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 수록한 독서의 저서들을 보면 역사서적과 문학작품들까지  댜양하다. 원문대로 소개하는 편이 참고에 도움될 듯하다:  Thomas Macaulay, Waren Hasting’s Indian Policy; History of England; Edward 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Rome;Mackenzie, Indian Empire in the 19  th Century, Macarthy, History of England. Shakespere, Ingersoll, Nathananiel Hawthorne, Edgar Foe, Victor Hugor, Thomas Carlyle, Ralph Emerson  등의 역사와 문학작품들을 탐독한 것을 보면 그의 문명과 역사에 관한 관심이나  꿈을 엿보게 한다.  약육강식의 국제관계나 영국의 인도경약에 관한 공부는  그의 약한 조국의 열강에서의 생존모색을 위한 관심이라 할 수 있으며, 세계적인 문학가들의 고전적인 작품들의 독서들은 그의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의 인격과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윤치호는 미 중부나 동남부의 명문 벤드빌트나 에모리에서 유학하는 동안 교내외의 행사나 서클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벤드빌트 시절 그는 문학서클이나 논리학회 철학회 등의 토론회에 참여하고, 시 문학의 낭속회에 참석하고 각종 강연회의 연사나 대학과 국제적인 YMCA  대회의 연사로  초청되기도 했다. 에모리에서도 Y 의 강사만이 아니라  메모리 대학의 양대 토론회의 하나인 ‘퓨 학회’ Few Society 의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에모리 졸업생들의 영예라 할 ‘시니어 Senior’로 선발 추대된 것은 그의 인격과 능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외국 학생들이 많지도 않은 미국 대학에서 외국 유학생에게는 꽤 드문일이었기에 윤치호의 대학에서의 토론회 회장이나 시니어의 추대는 자랑스런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상해에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 윤치호가 유학하던 벤더빌트나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도 교내외의 기독교 활동과 주변의 감리교에서의 참여와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고 주목할만하다. 벤더빌트 유학하던 1888년 12월에 그는 벌써 교회초청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고 조지아에서는 제19아 조지아 주일학교연합회에서 한국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난 초청이나 모금 전도 강연 회수는 무려 벤더빌트에서 50여회, 에모리에서 100여회로 150여차니 되기에, 그의 5년여의 재미시절은 그후 어느 한인들도 따르기 힘든 황동이었다. 그의 강연의 주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의 기독교 선교 현황 등에 관한 것이요, 때로 자신의 유학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 나라들의 풍습과 예절 등을 유머와 위트로 소개하며 미국 기독교인들의 동양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1893년 9월 윤치호가 에모리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달러를 기탁하며 한국 선교를 간청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기독교에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선교해 주기를 열망했던가를 보여주며 기탁한 달러는 그가 모금 강연에서 얻은 것이기에 흥미롭기도 하다. 그는 이어 1895년 8월에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헨드릭스 감독  Bishop E.R. Hendrix 에게 한국 방문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1895년 10월 13일에 헨드릭스는 미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  C. F. Reid와 함께 서울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ㅔ 153;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I, p 444)

 
이 밖에도 윤치호는 미국 학생들외 대외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참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일기’에 따르면, 기회되는 대로 동참했다.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벤드빌트 시기엔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죠지아에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그는 사생활에 관한 내용들도 ‘일기’ 담아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시귀임,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나라를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 Tillet와 성경사 교수 호스  Hoss, 캔들러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의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5년여 미국에 유학하며 윤치호가 배운 것은 무엇이어는가?  첫째는 미국이 최대의 문명국이라는 것이다. 우막에 살며 마차도 없이 흑토 길을 겨우 걷는 한국의 형편이나 미국은 새로운 빌딩과 화려한 동시를 형성하고 대로를 기차로 달리며 바다엔 스팀기관으로 움직인다. 국제사회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열국경쟁에 의해 생멸하기에 한국의 살길도 개화를 통한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무는 조국의 힘을 키워 한국이 정치변혁을 통해 문명국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룰 위해서 “청국 세력을 제거”하고 “낡고 무지한 정치를 쇄신”하며 “개화제국의 모델을 따라 문명을 추구하고 과감한 “개화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윤치호는 국가변혁에 앞서 먼저 해야할 일은 백성을 깨우쳐 정치변혀을 이루는 힘을 키우고 한민족을 문명국 자질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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