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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유학한 오긍선과 하란사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박성모 기사입력  2009/05/02 [23:12]
이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이민 직전인 1902년도에 도미한 유학생들 중에 특출했던 오긍선과 하란사에 대해 살펴보자. 오긍선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개화파로서 이상재 등과 협성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다 1902년 미국에 유학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했다. 그는 이어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그의 유학을 주선한 선교사들이 원하던 대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5년여의 공부와 수련을 마친 그는 1907년 의학학위를 마치고 곧 이어 루이빌 시립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피부과 전문의의 수련을 받았다. 동시에 동년 10월에는 미국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6년간의 미국 유학과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오긍선은 전북 군산의 야호병원장에 취임하여 의료봉사를 시작하고, 1909년에는 군산에 영명중학을 설립하고 교장직을 맡아 청소년교육에 힘쓰며 교회도 개척했다. 1910년부터는 광주 목포등지에서 의료와 교육, 선교 등의 봉사를 하다가 1912년에는 남장로교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와 진료의사로 취임했다. 이는 한인으로는 첫번쩨로 등용되는 교수직이었다. 1916년에는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세브란스에 피부과를 설립했다. 그는 이 학과의  책임을 맡으며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 설립과 고아양육사업도 겸했다. 1934년엔 에비슨 교장 후임으로 제2대의 세브란스 교장직을 맡아 의학교육에 전념했다. 이에 미국의 모교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는 그의 교장 취임을 축하하며 그에게 명예 이학박사와 명예법학 박사의 학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이런 오긍선을 의학교육에 전념하도록 그냥 두지 아니 하였다. 오긍선은 일제가 황민화를 위해 설립한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 가담하게 하여 친일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후 오긍선은 적극적인 친일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결국 친일파의 오명을 가지에 되었다.

    그러나 오긍선과 같이 1902년에 유학한 하란사는 그의 신분이나 공부의 시작부터 이후의 생에 있어서까지 아주 대조적이었다. 후에 하란사로 알려진 본인은 본성이 ‘김씨’라는 것 외에 아무런 이름도 없는 아낙네로, 1875년 평양에서 출생한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신분의 어린 소녀가 1남3녀를 가진 인천 감리 하상기란 정부관리의 후처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상류 양반 계층은 아닌 듯하다. 그녀는 후처로 간 남편 하 河씨 성을 따랐고 세례명으로 받은 낸시  Nancy 를 이름으로 삼아 한자로 표기하니 란사 蘭史가 되어 하란사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남편의 지위가 높아지며 생활은 풍요해갔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던 하란사는 특히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인천에 살며 개화된 서구문명을 접하고 미국에서 온 여선교사들의 활동봉사를 보며 스스로도 배워 개화되기를 원했다.

이때 서울에서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위해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란사는 쫓아갔으나 기혼여라는 이유로 3번이나 거절을 당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포기하고 말았겠으나 신교육열에 불타는 하란사는 이번에는 묘안을 가지고 당시 입학을 책임진 프라이 L.Frey 선교사를 밤중에 찾았다. 하인에게 촛불를 켜들고 프라이 방에 들어간 그는 촛불을 꺼버리고 의아해 하는 그에게 “우리가 캄캄하기는 이 등불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을 열어 주십시오”라 애원했다. 프라이 학감은 이런 하란사에게 서 장차 암흑의 한국을 위해  큰 인물이 될것을 예견 하면서 1896년 입학을 허락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화학당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에 딸을 낳기도 했으나 남편의 이해 협조로 열심히 배웠다.  때로 남편은 하녀를 시켜 점심배달도 해주며 어린 딸도 집안에서 보살펴 주는 등 외조를 아끼지 안했다. 남존여비의 시대, 여러 전처의 자식들이 있고 어린 부인이 난 젖먹이 딸 아기를 둔 아내가 공부에만 정신을 팔고있는 하란사였다. 보통 남편이라면 그만두게 하거나 집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겠으나 하상기는 전통적인 한국의 가부장적인 범부가 아니었다. 여하튼 어린 부인을 적극 지원하여 1896년 박에스더 등과 함께 졸업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한 남편 하상기는 치하받을만 하다 여긴다.

하란사는 이화졸업으로도 부족을 느끼며 1896년엔 더 문명한 해외 유학을 결심한다. 하상기는 이런 아내의 뜻을 이해하고 적극 후원한다. 이에 하란사는 먼저 1년간 일본을 유학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이런 하란사는 마침내 1902년 열망하던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남편의 학비 주선으로 오하이오 주의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안 대학  Ohio Weslian College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906년에는 한국 최초의 영문학 전공의 문학사  Bachlor of Arts 학위를 받았다. 그의 영어는 유창하여 손색이 없고, 기독교 신앙과 민족애의 정신이 뚜렷하여 생의 노선이 선명하며, 성품 명쾌하여 인간관계가 아름답고, 훌륭하고 능력있는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봉사를 보며 그런 생을 살기 열망하였기에 이제 하란사에게는 귀국하여 어둡고 기우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봉헌봉사의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학위를 마치던 1906년 바로 귀국했으나 그는 이후에도 자주 기독교의 국제적인 회합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의 당위를 역설하고,  한인들이 많은 미국의 대도시를 순회하며 재미동포들 에게 기독교 정신과 구국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강연을 하며 다녔다.

1906년에 귀국한 하란사는 스크랜톤 부인이 세운 영어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정규 학교이기보다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불우한 기혼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1908년는 앨벗슨  M.M. Albertson 이 학교책임을 맡으면서 하란사와 함께 일했다.  이들은 학교를 다만의 영어학교가 아니라 성경학교가 되게하고, 이는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로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게 한것이다. 1910년부터는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고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을 실시하게 되면서 하란사는 이 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했다. 그는 계속하여 이 학교의  교감과 기숙사 사감을 맡고, 이화의 여러 분교들도 책임지며 철저한 교육을 했다. 이에 ‘호랑이 할머니’ 소리를 들으며 국내 한국 여성들을 일깨우는 선각자의 구실을 담당했다. 1909년 4월에는 그의 교육 선교 사회봉사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여러 어두운 문제들에 관심하며 남여의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고종이 친히 경희궁에서 큰 대회를 열고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박에스더 등과 함께 하란사를 치하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런 하란사는 1915년에는 큰 불행을 당한다. 그가 낳은 딸 자옥이 이화고 졸업반이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게 된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년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리는 미국 감리교 총회에 한국 감리교 평신도 대표로 신흥우와 함께 참석했다. 그는 1개월 여의 총회에서도 기회만 되면 미국 교인 감리교 대표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렸다. 총회 후에도 미국에 남아 미국인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말하며, 미국의 대도시 뉴욕 LA 시카고 등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배일 구국을 위한 강연을 하고 한국교회와 민족운동을 위한 모금도 하여 왔다.

하란사의 특징은 독립운동과 선교전도활동이 별개의 것이기보다 바른 복음을 통한 백성들의 깨우침과 불우하고 어려운 여성들을 교육하여 잘못된 조상들의 악폐에 갇힌 그들을 해방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엄하게 창조된  남녀노소의 한민족이 억압의 일본에서 해방되어 다같이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각 교회 안에 세워진 보통학교 단위의 ‘어머니 교실’에서 성경공부만이 아니라 육아법과 선진 외국의 문명 등을 소개하며 그들이 부족한 국문과 산수도 가르쳤다.

1911년 윤치호가 당시 영문의 ‘한국 선교 잡지’  The Mission Field  7월호에 ‘기술교육의 필요성’  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 이란 글에서 신여성학교의 교육에 대한 비판을 게재하자 동잡지 동년 12월호에 하란사가 그 대답을 겸한 대응을 하면서 전개된 논쟁은 ㅇ주  흥미롭다. 사실 당시 윤치호는 나라나 한미 교계의 위치나 영향력으로도 상당히 큰 비중의 지도적 인물이었고 하란사는 미구 유학을 다녀와 한국 신여성들을 계몽하기 시작한 젊은 교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비판에 일부 동의하나 그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지적했다. 윤치호가 비판한 요지는 하나, 신식학교 학생들이 요리법을 모른다. 둘, 바느질하는 법도 모른다. 셋, 옷감을 자르고 박고 다르미질도 모른다. 넷, 어떤 때는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다섯,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 여섯, 학교를 전혀 가보지 못안 여성들같이 힘든 일을 하려는 준비가 안된 듯하다 는 등이다.

이에 당대 신여성의 대명사 같이 불리던 하란사는 ‘하나의 반대’  A Protest 라는 글에서 윤치호 글의 어떤 내용은 동의하나 다음 몇가지는 그런 비판자들이 알고 기억해야 된다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정상의 고등하교 졸업학생일지라도 그들이 요리하고 바느질 잘하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은 학교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슬기로운 어머니들이나, 충실한 아내들, 개화된 가정주부들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신여성이지 요리나 간호, 침모를 배출하려는 것은 아니다” (the aim and purpose of the instructions given by the fine institutions are to produce a new type of women who will become wise mothers, dutiful wives and enlightened housekeepers and not cooks, nurses nor seamstrsses.)라는 등의 요지였다. 여성에 대한 오랜 한국적 관습을 타파하며 새로운 어머니와 아내, 가정에서의 여성상을 창출하기에 적절한 답변이었다. 개화 진보적이며 서구문명을 터득하며 남녀차별을 반대하던 윤치호였으나 여성의 입장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하란사는 잘 지적한 것같다. (The Mission Field Vol.VII, No.7 & 12,  1921  참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고종은 거족적인 민족 저항운동으로 국권의 회복을 바랐다. 그리고 이에 앞서 미국에서 공부한 의친왕 이강을 1919년 6월 파리강화회담에 파견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자 하란사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고종이 1919년 1월 승하하자 무산되고 말았다.  궁중의 공식발표 전에 하란사는 즉시 궁중의 의친왕을 만나  고종의 승하를 확인했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하란사는 북경으로 갔고 동포들의 환영 만찬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갑작이 죽고 그의 시체에는 검은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한 성서공회 책임자  베커도 몸이 검은 색으로 변한 시체를 보며 독살의 심증을 굳게 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고 의친왕과 함께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꾀하던 하란사를 일제가 그냥  둘리가 없었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에 다녀온 뒤 아내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을 당했을 것으로 단정했다.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하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했다는 소문을 남긴채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나이 45세의 한창 나이였다.

 1902년 오긍서와 하란사는 동년에 미국에 온 다같은 크리스천 유학생들로 하나는 최초의 미국 피부과 전문의사로, 또 하나는 영문학을 전공한 최초의 미국 문학사로 귀국하여 기우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헌봉사 했으나 그들의 말년은 하나는 친일로, 또 하나는 반일로 나뉘었다. 여하튼 나라를 강탈당한 민족의 서러움이며 국내외 어디에 살던 진정 나라를 지키며 민족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 후손된 우리도 숙고와 선택이 요한다. 우리 동포들도 미국에 유학하던 하란사와 같은 민족의 선각자의 올곧은 선택과 생을 살며  더 훌륭한 재미사회를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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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02 [23:12]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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