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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생활개선과 민족운동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박성모 기사입력  2009/05/02 [23:03]
유학 차 미국에 왔으나 초기 대륙동포들의 무질서한 생활을 목도한 안창호가 이들의 계몽과 생활개선,  점차 민족운동을 조직화하며 전개한 활동에 관해서만 일별하려 한다. 사실 안창호는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반일구국적인 특출한 민족정신, 더욱이  그의 감동적인 능변과 솔선수범하는 열정적인 민족운동으로 국내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결혼 1주 밖에 안된 아내 이혜련과 함께 1902년 말에 선진 미국에서 교육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더 효과적인 애국애족적인 민족운동을 펼쳐보겠다는 큰 꿈을 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영어도 부족하고 가지고 온 것도 없는 저들의 미국 땅 초기의 생활이 어렵기는 다른 이민자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숙식을 위해 그가 먼저 구한 직업은 미국 가정에서 청소와 잔일, 음식도 만들고 아기를 보아주며 세탁도 하는 등의 가정부 ( House Work)의 일이었다. 도산은 이런 일을 하며 미국 중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할 나이 24세의 청년이 12-18세 십대들과 어울려 공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으나 도산은 열심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이곳 지방신문에 안창호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그의 나이가 게재된 게 여자교장의 눈에 띄며 문제가 되어 결국 퇴학을 당했다. 다른 학교를 찾아다니나 그 연령으로는 받아주는 학교가 없다. 집 주인은 “동양인인 네가 연령을 주리면 아무 문제가 없이 입학이 허가될텐데…” 하며 권면했다. 그러나 도산의  태도는 너무나 분명했다. “입학이 되지 못할지라도 양심은 속일 수 없다” 는 것이었다. 도산의 인품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평소 그가 “한국을 망친 원수는 거짓말이다. 한국인들아 정직하라” 하던 그대로를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이기에 누구도 더 이상 권면할 수도없었다. 그러나 이런 도산을 안 어느  여교장이 그의 입학을 허락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항 거리에 나갔다가 상투싸움하는 동족을 목도하고 그 싸움의 원인이 남의 구역을  침범하여 인삼을 파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또한 그들의 생활이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미국사회의 밑바닥을 헤매며 20여명에 불과한 동포들이 무질서한 생활 속에서 피차 싸우는 당시  동포사회의 현실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결심한 바가 저들을 계몽하고 생활개선을 하며 민도를 높여 이 미국 땅에서 존경받는 고매한 백성이 되게 하고,  동시에 망해가는 조국을 위해 본토에선 일인들의 감시로 할 수 없는  반일애국운동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첫번 째 시도가 친히 비를 들고 동포가 거주하는 집 안팍과 유리창을 닦고, 천과 철사를 사다가 커틴을 만들어 달아주고, 창문과 문 앞에 화분을 놓고 꽃을 심었다. 동포들도  처음에는 의아해 하고 거부했으나 차츰 믿고 환영하며, 생활이 개선되고 외양이 정돈됨에 따라 정신도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그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1903년 9월 23일에 단체를 조직하니 이것이 미대륙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조직된 ‘친목회’다. 그 동지들은 박성겸, 이대위, 김성무, 박영순, 장경, 김병보, 전동삼, 박승지 등이며 안창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친목회의 목적은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미국인들도 존경할만한 문명인 답게 살자는 것이었다. 몸차림을 단정히 하고 주의를 깨끗이 정돈하며 검약절제의 생활을 하고 미국의 예의범절도  배우게 했다. 인삼구역을 정하여 자기 구역에서만 장사하며, 중국거리에 드나들며 주색잡기에 돈을 낭비하는 일도 삼가고 저축하여 고국 송금도 격려했다. 불과 2년도 안되어 동포들의 생활은 개선되고 한국인에게 집을 세준 미국 주인은 아주 좋아하며 그 뒤에 안창호 등의 친목회원들의 노고가 있음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안했다. 때마침 하와이의 동포들이 상항으로 이주하여 오면서 회원은 50여명으로 증가했다. (김원모, 재미한인50년사, 도서출판 해안,2004  P.78)

 이에 안창호 내외는 상항에서  천 여리 먼 남쪽 30여명의 한인들이 산다는 LA 가까운 오랜지 카운티의 리버사이드 (Riverside)로 이거하여 왔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은 1905년 4월 5일에‘공립협회’를 조직했다. 이는 친목회의 확장이요 하와이에서 신민회가 실패한 후 최초로 조직된 정치적 운동 기구이다. 그 목적은 오직 어려운 중에 서로 돕고 동족끼리 진정으로 사랑하며 항일운동을 거동포적으로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회관은 처음에는 상항에 두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옮겨 다녔고  LA에 6개 지방회를 설립하는 등 확장되어 갔으며 안창호 송석준 정재관 등이 총회장으로 수고했다. 그사이 공립협회는 기관지로 ‘공립신보’( The New Korea)를 창간하여 그 첫호를 1905년 11월 22일자로 발행했다.  방화중, 임치정, 송석주, 정재관, 최정익 등이 주필로 수고하며 신문은 한인들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힘썼다.  당시 동포 대부분은 교인들이었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공립협회를 통하여 단체생활의 공동훈련을 받았다.

독립협회 규칙에는 어찌보면 유치할 정도의 다음 다섯까지 실행조건들이 나오나 이는 동포들의 수준이 아직 그만함을 반영하며, 이를 극복하며 민도를 조금이나마 향상하려는 구체적 실례라 보인다: 하나 아홉시에 잘 것, 둘 속옷만 입고 외출하지 말것, 셋 방을 깨끗하게 정리할 것, 넷 버는 돈은 저축하거나 본국에 송금할 것, 다섯 중국거리에 가서 돈을 쓰지 말 것 등이다. 귤밭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많았기에 도산은 “귤 한 개를 잘 따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며 귤 하나를 따는 자세로도 한인들의 성실한 노동정신을 보이고 미국인의 칭송을 받으며 한민족의 품위와 민도를 높이는 수련으로 삼으려 했다. 동포들의 몸차림이 깨끗하고 사는 주변이 정돈되며 농장 일의 능률이 향상되기에 미국인은 한국노동자를 환영할 뿐 아니라 그 동안 일인이나 중국인을 배척하던 주민들이 한국인들을 환영하며 이곳의 미국교회에서는 특별히 한국인을 초대하여 환영예배까지 보았다. 환영석상에서의 미국 목사의 다음 환영사는 도산의 동포들을 위한 노고의 실효가 생생하게 엿보이기에 인용한다:

“그동안 이곳에 와서 1년 이상을 지내고 보니 여러분 모두가 좋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의 생활실태를 우편국에 가서 알아 보았습니다. 다달이 돈을 부치는 이가 많더군오. 은행에도 알아보았습니다. 버는 대로 저축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중국인 거리에도 알아보았는데 여러분은 좋지 못한 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이 점은 우리 미국사람이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담배 피우는 습관마저 버린다면 나로서는 더욱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마는 … 야간학교 선생에게  물었는데 그 동안에 진전이 많았다 하고 주일학교 선생의 말에 의하면 성경에 대하여 여러분이 우리들보다 더 잘안다고 합니다. 나는 한국인을 세계에서 드문 부지런하고 선량한 문화인으로 보아 오늘 이런 자리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과수원농장 사장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성실함을 극구 칭찬하며 그 뒤에 안창호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음을 감사하고 성경과 찬송가 등을 기념품으로 주었다. 이에 도산은 한국인들이 정성으로 일을 잘하려 하나  아직도 더디고 서툴러 미안하다며 숙련이 되면 더 잘하게 될 거라 했다. “우리 한국인을 더 사랑해 주십시요. 다른 곳의 동포들도 당신들 같은 고마운 미국 사람들을 만나 성과를 올려 한미간의 우호가 증진되었으면 합니다.”는 답사로 끝냈다. (한승인,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 1980.  pp.53-55) 이런  도산의 노력으로 리버사이드 일대에선 이곳을  “도산 안창호의 소공화국” 이라 불릴만큼 칭찬하기도 했다.

개인과 사회와 나라의 번영을 위한 도산의 지도방침에 대해 한승인은 그의 안창호 전기에서 다음의 네 가지를  적절하게 제시한다. (한승인, 상기 서  pp.56-57): 1)백성의 계몽: 고국에서도 학교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하면서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것을 구국의 첫 단계라 믿고 그 실행에 힘썼으며, 도미 후 상항과 리버사이드에서도 야간학교를 세우고 강연을 하며 신문을 발행하여 동포들의 계몽과 저들을 일깨워 민도를 높이려 했다. 2) 단체 훈련: 몇십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있으면 단체를 조직하고 회원이 책임질 규칙을 상세히 정하여 그들을 수련한다. 도산은 먼저 솔선수범하여 본을 보이고 회원들도 자기 책임을 다하도록 한다. 말과 글 보다는 행함으로 본을 삼는다. 3) 실행 순위: 작은 일로 시작하여 큰 일, 큰 규모로 발전 확대한다. 먼저 자기 자신과 가정, 자기의 가까운 사회나 교회 등의 공동체에서 시도하여 성과를 보면 동포사회나 민족 국가에서도 시도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공맹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같다. 4) 신앙생활: 동족에게 종교적 신앙생활이 무엇보다 귀중함을 말하며 스스로 실행했다. 기독교의 진리나 교리를 배우고 믿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실행하고 사랑하며 사는 신행일치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런 도산의 신념과 동족에 대한 열정이 그로하여금 끊임없이 동포들의 계몽과 수련, 인격의 연마에 노력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에서 한민족의 기상과 민도를 높이며 이민족의 칭송을 받으며 구국적인 운동을 더 힘있게 추진하게 했다.  

물론 도산 외에도 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구국활동을 펼쳤고 다양한 단체들을 조직하며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와이나 본토할 것 없이 당시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곳에서는 한국인들의 친목과 사회 또는 정치적인 단체들이 많이 생기며 활동도 다양했다. 필요 이상의 대립 경쟁 등도 심해 한인의  정력을 낭비하기에  단체들이 통합하여 동포사회나 반일구국 운동을  효율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이런 목소리가  점차 커지던 중 장인환 정명훈의 스티븐슨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그 충격이 마침내 여러 갈래로 분열된 한인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어 1909년 2월1일에 하나의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과 활동 미국내외에서의 위상이나 그 이후 ‘흥사단’ 조직 등의 안창호의 국내외의 활동에 대해선   뒤에  재론하려 한다.

다만 여기선 도산의 도미 전후 생의 전기만을 간단히 소개한다. 안창호는 1878년 11월9일 평남  강서에서 어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씨의 3남으로 태어나 1890년 평양에서 서당을 다녔고 16세되던 1894년엔 서울에 올라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영어와 서양의 선진 과학문명을 배우며 기독교 신앙도 받아들이게 된다. 20세되던 1898년엔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의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동년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그는 웅변으로서 청중을 감화함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1월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의에서는 7대신을 탄핵하고 6개조의 정치개혁안을 건의했다.  1899년에는 평양 강서에 점진학교를 세워 한국의 최초 남녀공학의  교육과 함께 황무지의 개간사업을 벌리고 가양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던 중에 24세되던 1902년 9월3일 밀러복사의 주례로 동지같이 함께 공부하고 운동을 펼치던 이혜련과 결혼을 했다. 처음엔 약혼 상태로 혼자서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주변의 권고와 본인들의 의논 끝에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합의하여 결혼하고 같이 유학길에 나선 것이다.

그들은 하와이 캐나다 벤쿠버를 경유하여 시애틀로 왔다가 여기서 기차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런 안창호가 상투를 잡고 싸우며 미국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을 본 뒤 유학의 큰 꿈을 접고 이들의 복지 (Wellbeing)만을 위해 저들의 계몽과 생활개선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도산의 육비에 새겨진 평시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동포사회의 첫 단체이던 샌프란시스코의 한인친목회의 탄생이 그가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 해인 1903년 9월 23일이었던 사실도 동포들의 참상에 대한 주저없는 그의 품성과 결단을 잘 전시하는 대목이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의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한 안창호는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각성 운동을 전개했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우며, 평양에는 도자기 회사를 세워 교육 문화 산업 등 모든 방도의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에는 박중화 최남선 김좌진 이동녕 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했다.

1911년 일본 총독 데라우찌 암살음모사건의 누명을 씌우려 하자 다시 뉴욕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계속 구국운동을 펼쳤다. 1913년`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랜 동안 생각하며 그의 필생의 사업이라 할 ‘흥사단’을 거동포적으로 창립하되, 장래 그 기반을 국내에 둘것을 염두에 두면서 8도에서 그 대표를 두루 선출하여 결성하며 국내외를 막라한 거국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안창호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부총장과 노동총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편 흥사단을 통한 민족운동도 전개했다.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의사의 거사로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어 대전감옥에서 3년간 옥고룰 치루고,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 중, 1938년 3월10일에 간경화증으로 서거했다. 아직도 조국해방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60세이기에 한국인들의 애석함이 그지 없었다.(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로섬, 경인문화사,2002. 472-501).

 

끝으로 이민 전후기 하와이나 대륙의 한인 이민자들을 계몽하고 민족운동을 펼치던 안창호의 지도나 인격이  그날 만이 아니라 아직도 그 후손된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교훈이 되기에 그 요지만이라도 되새겨보려 한다.  실은 장리욱, 주요한, 한승인의 도산 전기는 물론 그를 친히 보살피던 춘원 이광수나 최남선 등까지도 저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구동성으로 안창호의 고매한 인격이나 대인관계, 민족의 기상에 대해 고증한다.

첫째 그의 진실함과 정직성이다. 한민족을 망친 원흉을 거짓과 거짓말로 보고 개인이나 민족이 다같이 정직하기를 염원했다. 거짓에 도취되어 보이는 한민족에게 “거짓없는 사람들이 모여 거짓 없는 단체를 만들고, 거짓없는 사업을 거짓없이 달성하자”고 외쳤다. 둘째 외유내강의 성품에 늘 이타적이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고 끝까지 정중히  대하며, 사물의 합리성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양보하고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고 관대함을 보였다. 셋째 신사적 예의범절과 친절 인자함이다. 스스로는 늘 정좌 단정하며 사람을 대하여는 “그 사람을 정시하고 곁눈질하여 보거나 외면하는 일이 없다. 상대가 말할 때엔 주의 깊게 경청하고 그의 말이 끝나면 자기 입을 연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붉히거나 노하거나 비웃거나 비난하는 일도  보지 못하였고, 자기의 자랑을 말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손님이 오고 갈 때에는 정중하게 맞고 보낸다.”사람의 잘못을 발견하면 그 앞에서 친절하게 알려주고 그 잘못을 뉘우쳐 앞으로 자기 일을 올바르게  하도록 한다.

넷째 그의 심사언동의 대부분은 나라와 민족으로 채워지고 일본의 재판장이 그의 애국애족운동을 재판할 때 안창호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내 민족을 위해 먹고 잤다”며 당신 나라를 이국 강대국이 침략하면 재판장은 그냥있겠느냐며 그를 꾸짖을 정도였다. 1907년 도산이 미국에서 일시 귀국하여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한반도의 개혁운동을 펼칠 때, 일본의 한국통감 이또오가 도산에게 새 내각조직을 부탁하며 한국이 일본과 손잡고 같이 일하자고 권면하는 그를 향한 대답이 무엇이었던가? “그대의 일본을 잘 살게 만든 사람이 일본인인 그대였던 것처럼, 한국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혁신케 하라. 만일 명치유신을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이 와서 시켰다면 그대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했다. 그의 민족위한 애국애족심은 일인들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민족과 조국을 사랑했던 안창호가 정규 이민 전기의 맨 마지막에 미국 땅에 당도하여 이민 전후의 모든 재미동포들을 돌보며 지도하였기에 당대의 한인이민자들은 물론 오랜 세월 뒤의 그 후손된 재미동포들은 결코 그를 잊을 수 없다. 우리 후손들에게도 그의 인격과 가르침을 길이 기억하게 하며 민도 높고 고매한 민족이 되게 해야 할것이다.  

<박성모/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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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02 [23:03]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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