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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입대에만 쓰는 미국 영주권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28]
변호사로부터 잠적하는 것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은 뒤 나는 은행으로 갔다. 우선 타지방으로 떠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행에도 이미 이민국의 손이 뻗혀 있었는지 정부지시로 출금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불안해진 나는 낭패한 마음으로 며칠을 모텔에서 지냈다. 다시 은행을 찾아가 이번엔 5백불만 출금신청을 했더니 어쩐 일인지 돈을 주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나머지 돈을 마저 찾은 뒤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탔다. 떠나기 전에 타고 다니던 밴은 아직 융자금을 덜 갚은 터라 융자를 받았던 저지시티 은행의 주차장에 세워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짓이었지만 미국생활을 잘 몰랐던 당시에는 그 차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묘안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뒤에 알게 된 얘기로는 그 동안 꼬박꼬박 불입되던 모기지가 안 들어오자 은행이 차를 압류하기 위해 추적을 했는데 며칠만에 문제의 차가 바로 자기 은행 주차장에서 발견되어 그 은행의 관계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뒤에 얘기가 나오지만 그런 일 하나하나가 미국에선 훗날에 좋든 나쁘든 작용을 한다. 그게 아마 신용사회라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때때로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옳지 않은 일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이득을 위해 다른 개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삼가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다했다. 미국사회는 그것을 대부분 사주는 것 같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던 것은 일단 뉴욕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어떻게 해볼 방도를 찾아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고생 끝에 좋은 시절을 만났나 싶자 곧 이 지경이 되자 내 운명이란 것이 결국 이런 것이구나, 하는 실의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이란 단어와는 생리적으로 거리가 먼 나로서는 실의란 정말 잠시 뿐, 곧 다시 혈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살아오는 동안 별의별 인생을 다 겪어본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나쁜 상황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나는 우선 다운타운의 허름한 모텔에 짐을 풀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어디쯤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한인 가게가 많이 보였던 걸로 봐서 지금은 커다란 코리아타운이 되어있는 올림픽가 근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몇몇 그럴만한 한인업소들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분위기를 우선 살펴 보았는데 별로 애착이 가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은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나의 삶을 바꿔놓고는 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에 입대할 수 있는 영주권이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가짜 영주권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나는 귀가 솔깃해서 당장 그쪽으로 돌아앉았다.

"언뜻 듣기에 영주권 얘긴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으면 나도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왜, 미군에 입대할 생각이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까 해서 여길 왔는데 기왕 여기까지 와서 길만 있다면야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럼 합시다. 2천불 가지고 있어요?"
즉석에서 아주 간단한 흥정이 오갔다. 당장 1천불을 내면 나머지 천불을 영주권과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브로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아무 담보도 없이 맡기는 게 걸렸다.
"못 믿으면 할 수 없는 거지 그게 무슨 증거를 내보일 수도 없는 일이고 어쩌겠수?"

그는 허허 웃으며 배짱을 부렸다.
"꼭 하시려면 믿고 하세요. 그 분은 저희도 아는 분이니까 어디로 사라질 분은 아니에요." 하고 식당 여주인이 거든 것이 결정적인 담보가 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수단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일단 5백불을 먼저 주었다. 그는 증명사진과 선금을 받아 넣고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이 활활 타오르는 대낮. 약속한 거리에 나가 차 속에서 기다리려니 간첩이라도 접선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뉴욕과 달리 로스앤젤레스는 대낮인데도 거리가 한산했다. 도시가 펑퍼짐하게 퍼져있어선지 행인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벽돌 색의 허름한 폰티악이 내차 뒤에 와서 멎었다. 식당에서 헤어진지 두 시간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는 영주권을 건네주었다. 진짜를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제대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이민국 직원과 짜고 진짜를 만들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진짜영주권이나 받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이제 마음놓고 미국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주권을 받아 쥔 나는 곧바로 모병소를 찾아 나섰다. 미국대륙에 발붙일 데 없는 혈혈단신인 나로서는 다른 데로 딱히 갈만한 곳도 없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으면 단숨에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워낙에 내 성격이기도 했다. 지니고 있던 돈은 아직 넉넉했으므로 렌터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얼른 눈에 띄는 모병소를 다짜고짜 들어갔다. 30대 중반쯤 된 듯한 남미계 남자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편리한 시간에 와서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치러 본 필기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영주권만 받아 쥐면 저절로 입대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다시 시험을 보려면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렌터카를 몰고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라는 새크라멘토를 향해 떠났다. 다른 지역에서는 언제든지 다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새크라멘토는 샌프란시스코 서북쪽에 있는 도시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7-8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지만 하루가 급한 내게는 지척이나 다름없이 생각되었다. 바다 저쪽에 고국이 맞닿아있을 태평양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를 달리며 외롭고 서글픈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갔다. 내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 고국이지만 태양이 마지막 광채를 길게 적시고 있는 붉은 바다를 바라보니 잊어버리고 있던 한국 땅이 그리웠다.

그날그날 생활에 바빠 고향 생각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날이 저물자 나는 한적한 곳을 찾아 차를 세워놓고 그 속에서 새우잠을 잤다. 지금 같으면 위험천만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거액이라면 거액인 현금까지 지니고 있었잖은가. 당시만 해도 두려움을 몰랐다. 또 지금처럼 세상이 험악하지만도 않았다.

다음날 나는 오클랜드에서 운 좋게 모병소를 만났다. 구경 삼아 길거리를 드라이브하고 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를 읽지도 못하고 치르는 시험이었다. 새크라멘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미국 곳곳을 구경은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시험을 여러 차례 보다보니 내용은 모르지만 대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 것도 같았다.

빌어먹을. 중학교만 다녔어도 첫 방에 거뜬히 합격할 것을 가지고! 나는 새삼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돌이킬 수도 없고 내 힘으로 어쩔 수도 없었던 것을 가지고 오래 마음에 품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차를 돌려 서쪽으로 떠났다. 광활한 미국대륙을 다 거쳐가면서 문제를 하나하나 외우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미군에 입대하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다시 두어 도시를 거쳐 세인트루이스에 이르렀다. 이젠 이 일도 숙련이 되어서 모병소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대의 모병관은 대뜸 “당신 한국인 아니오?”하고 묻더니 장황하게 자신이 한국에서 보냈던 군대생활얘기를 시작했다. 일이 되려니까 그것도 동두천에서 근무했다는 것이었다. 꽤나 심심했던지 아니면 한국생활이 정말 그토록 기억에 남아선지 그는 한참동안이나 얘기를 계속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는 동두천이 고향이기도 했지만 미군부대는 한때 내가 소위 '하우스 보이'로서 드나들기도 했고 또 6.25 때는 미군트럭을 씻어주고 돈벌이를 하는 등 이래저래 인연을 많이 맺어온 터라 그의 얘기가 낯설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우리는 본래의 용건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대와 달라. 여긴 군에 입대하는데도 시험을 치러야 되는데....”
나는 국민학교밖에 안 다녔지만 중졸로 학력을 속였는데도 그는 내가 붙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이미 시험도 치러봤고 공부를 해서 붙으면 될 게 아니냐고 버텼다. 그는 나의 굳은 결의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안타까운 눈으로 한참동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오케이, 하고 책상을 뒤적거렸다. 그가 꺼낸 것은 책이었다.

“자, 이걸 가져가서 자신 있다고 생각될 때 응시를 하라구. 시험은 아무 때나 있으니까.”
나는 신바람이 나서 모텔로 곧장 돌아갔다. 막상 책을 펼치니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밖에 못나온 나로서는 그걸 읽을 수조차 없으니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옛스!”하고 휘파람을 불며 책을 받아온 기쁨도 물거품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그림도 없는 책을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던 나는 눈이 번쩍 띄어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책 뒷부분에는 숫자와 알파벳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정답표임이 틀림없었다. 큰글씨로 A,B,C,D 네 가지의 문제지 타입도 윗머리에 찍혀있었다.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앞뒤 그리고 옆 사람에게 각각 다른 문제지를 나눠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정답을 깨알같이 쪽지에다 옮겨 적었다. A형 답안은 왼쪽소매, B형은 오른쪽, 하는 식으로 감춰두고 시험장으로 갔다. 내가 받은 시험지는 B타입이었다.

몇 개는 일부러 틀리게 답안을 적어 넣었다. 답안을 제출하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채점관은 구멍이 뻥뻥 뚫린 채점지를 그 위에 덮더니 정답이 없는 부분을 표시했다. 물론 합격이었다.
채점관은 뉴욕에서 왔다니까 모텔을 지정해주며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후 호텔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으려니 신체검사장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커닝이긴 하지만 합격은 하고 볼 것이, 그날부터 호텔비는 물론 밥값 등 일체를 군에서 부담했다. 나는 부지런히 싸인만 해주면 됐다.

신체검사가 끝나자 언제 입대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장 갈곳도 없는 터라 내일이라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병과는 공병이지만 병과와 근무지중 한가지는 내 뜻대로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별난 군대도 있다 싶었다. 나는 근무지를 골랐다. 물론 한국 근무를 희망했다. 한국에는 공병 병과가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탱크병과로 떨어졌다. 드디어 나는 미국육군이 되어 미조리주에 있는 신병훈련소로 실려갔다. 77년 7월 20일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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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28]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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