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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한국방
10달러 훔친 도둑
기사입력: 2010/11/28 [16:26]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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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보이스
내가 내린 곳은 맨해튼 미드타운의 피크 애브뉴와 매디슨 애브뉴 사이에 있는 「코리아 하우스」 앞이었다. 택시 운전사는 내가 코리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이 잘 안 통하는 나를 한국식당 앞에다가 내려준 것이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우선 설렁탕 한 그릇을 시켜 허기진 배부터 채웠다. 맨해튼 한복판에 한국식당이 있다는 게 반갑고 신통했다. 한국사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던 비행기 속을 생각하면 한국말이 통하는 것만도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이 정도라면 내가 벌어먹고 살만한 조건은 되는구나 생각하니 다소 안심도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나는 종업원을 붙잡고 한국가게들이 많이 몰려있는 데가 어딘지부터 물었다.

“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여종업원은 별 걸 다 묻는다는 투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한국사람이 많으니까 식당이 자리잡고 있을 것은 당연한데 괜한 걸 물었구나 생각하며 나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웬 흑인들이 그렇게 많은지. 두어 블록을 지나니 작은 광장에 까마귀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앉아 있는 것이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당장 부딪쳐보자 싶어 주변의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취직을 부탁했다. 아마 45가쯤에서 시작해서 30가 근처까지 사그리 훑어 내려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이 우선 “소셜 시큐리티 카드를 내놔봐라”는 것이었다.

“그게 도대체 뭐냐”고 묻자 아예 말상대를 하지도 않았다. 그게 없으면 취직을 포기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쉬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길거리를 헤매다가 어두워지면 지하철을 타고 케네디 공항으로 돌아가 대합실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샜다. 짐 보따리는 아예 공항 로커에다 집어넣어 두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녔다. 아침이면 공항 화장실에서 더운물로 대강 세수를 하고 냉수를 들이킨 뒤 전철로 맨해튼에 다시 나와 취직을 한답시고 종일을 헤맸다.
3일 꼬박 그 짓을 하고 나니 수중에 돈이라곤 일 불 짜리 몇 장만 달랑 남았다.

나는 대도시라고 뉴욕을 믿은 게 잘못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생각을 달리 먹어야 될 것 같았다. 그 많은 건물마다 온통 들어차 있는 게 점포들인데도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돌아다닐 때 눈여겨 봐 두었던 그레이하운드 버스터미널로 찾아갔다. 타임즈 스퀘어 남쪽에 있는 버스터미널까지는 갔으나 꼬부랑글씨로 빽빽이 적어놓은 행선지 가운데서 어디로 가야할지 암담했다. 그야말로 오라는데도 갈 데도 없는 처지였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주고 아무 버스나 집어탔는데 그게 뉴저지의 베이욘까지 가는 버스였다. 베이욘은 그렇게 해서 내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군대시절을 빼고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진짜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어딘가 멀찌감치 시골로 가서 농사나 짓겠다는 생각에서 찾아간 곳이었다. 한 2불 정도 찻삯을 냈던 것 같은데 그 돈이면 꽤 먼 농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한국 돈으로 치면 천원이 넘었으니 제법 '큰돈'이었다.

종점에 내린 나는 우선 논밭이 안 보이는데 실망을 했다. 도시도 농촌도 아닌 것이 아주 어중간한 곳이었다. 낭패한 심경으로 어슬렁거리다보니 어느덧 해는 어둠에 쫓겨 마지막 꼬리를 걷어가고 있었다. 나는 별 뾰족한 수는 없고 주머니 속에도 찬바람만 훽훽 도니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공원이 눈에 띄었으므로 나는 동상이 서있는 뒤쪽의 아늑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미국은 공원의 잔디까지도 가지런하게 깎아놓아서 거기 드러누우니 제법 두툼한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역시 죽으란 법은 없었다. 번화한 거리를 찾아 마냥 걷던 끝에 저지시티에 이르렀을 때였다. 빨간 색 조갑지를 커다랗게 그려놓은 노란 간판이 우뚝 솟아있는 쉘 주유소가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양인이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고 있었다.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오랜 항해 끝에 미국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컬럼버스 심정이 그때의 내 심정과 비슷했을 터였다.

기대했던 대로 주인까지 한국인이었다. 그는 내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신삥이구만. 한국서 언제 건너왔나?”하면서도 당장 일을 하라고 쉽게 허락했다. 소셜 시큐린지 뭔가 하는 것도 들먹거리질 않았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양복에다 구두를 빼어 신고 있었던지라 케네디 공항에 두고 온 가방 생각이 났다. 동전 두어 개 넣는 로커에 그렇게 오래 넣어 두어도 되나 걱정도 되었다.

“이봐요, 당장 일하라는데 가방은 무슨 가방이야? 며칠 있다 내가 갖다주면 될 거 아냐! 그대로  입은 채 일하라우!”

나는 주인이 내뱉는 소리에 기가 꺾여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펌프가 있는 쪽으로 가서 일할 채비를 했다. 역시 동족이 좋긴 좋구나 싶었다. 미국 와서 주유소까지 할 정도면 대단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종업원은 나말고도 4명이 더 있었다. 한국인 3명중 강덕보란 사람은 영어도 잘해서 챨리라는 백인 자동차 수리공을 거들면서 주유 관계 책임자 비슷하게 일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역시 나 같은 불법 체류자로 나와 함께 펌프질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국 간답시고 쪽 빼 입은 양복차림에 펌프질을 하고 있었으니 그 꼴이 참 볼만했을 것이다.

주유소에는 또 챨리의 보조였던 톰이 있었고 그 외에도 주인의 형이 사무실에서 잡일을 돕고 있었으니 종업원이 모두 여섯 명이나 되었다. 나는 다들 「아이크 박」이라고 부르는 주인이 정해준 베이욘의 아파트에서 다른 한국인 종업원과 함께 자취를 했다. 지은 지 백년도 넘은 5층 짜리 낡은 아파트의 1층 스튜디오였다. 누렇게 빛이 바랜 카페트는 얼마나 오래 전에 깔았는지 털이 다 빠져 걸어다닐 때마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냉장고에 가스 레인지까지 있어서 밥을 지어먹는데는 불편함이 없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밥이라야 저녁에 간단히 떼우는 게 고작이었고 아침은 주유소에서 빵조각으로 떼웠다. 얼마간을 지나고 보니 주인은 이만저만 지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점심때가 되어도 모른 척 하고 일만 시켰다. 대충 거른 아침에다 점심까지 건너뛰고 나면 뱃속이 쪼르륵거리다 못해 펌프 미터기에 나타나는 기름 값이 잘 안보일 정도였다.
“야, 너야 집에서 해주는 밥 배불리 먹고 나오니까 모르겠다만 저 사람들은 먹여야 일을 하지, 원! 넌 어째 사람이 그렇게 모지냐?”

때때로 보다못한 주인의 형 박씨가 동생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크 박은 그의 형 말에는 “아, 형님말씀 듣고 보니 그렇군요”하고 마지못해 햄버거를 사다 먹일 때도 있었다.

끼니를 거르게 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는 한 주일, 두 주일이 지나도 봉급줄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미국에선 일삯을 주급으로 준다던데, 하면서도 월급으로 주려나보다,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한 달을 기다렸다. 역시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참다못해 봉급얘길 꺼냈더니, “이 친구,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나, 원, 이봐! 당신 뭘 모르는구먼. 당신 같은 사람, 그나마 같은 한국사람이라고 일을 시켜주는 거야.”하고 오히려 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민국에서 알면 당장 추방도 추방이지만 한국 돌아가선 또 유치장 행이라고 은근히 협박까지 덧붙였다.

어떤 사람은 일년을 공짜로 일한 사람도 있다며 일찌감치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라던 동료 김씨의 충고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만두는 것도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두어 번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봤지만 아이크 박은 “가긴 어딜 가, 이 사람아!” 하면서 예의 협박을 은근히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종일 일하면서 처음엔 한눈팔 겨를도 없어 막상 그만둬야 사실 갈 곳도 없었다.
다행히 한두 푼씩 부수입이 있어 그걸로 몰래 햄버거를 사먹는 일도 있었다. 그때가 바로 제1차 석유파동 때라 미국에서도 휘발유 판매를 제한하고 있을 때였다. 자동차 번호에 따라 하루는 홀수, 다음날은 짝수만 기름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동차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다니기 어려운 미국에서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미국이라고 다급한데 소위 '사바사바'가 없을 리 없어 가끔 요령꾼들이 찾아와 휘발유를 조금만이라도 넣어달라고 사정하는 수가 있었다. 눈치껏 두어 갤런 넣어주면 한두 푼씩 더 얹어주고 가는 게 말하자면 부수입이었다.

주인에게야 기름 판 값만 입금시켜주면 되니까 나머지 돈으로는 주유소 옆에 있던 「학빈」이란 간이식당에 가서 햄버거를 사다먹곤 했던 것이다. 아는 것이 '햄버거' 뿐이라 주문대 뒤 벽에 줄줄이 붙여놓은 메뉴를 두고도 밤낮 햄버거밖에 사먹을 게 없었다. 동료들은 꼬로록거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 요령을 부리는 게 미안한 생각도 있어서 기름때가 꼬장꼬장 늘어붙어 있는 양복주머니에 넣고 몰래 뜯어먹자니 호주머니 속이 온통 찐득거렸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에 문을 열기가 바쁘게 손님이 나타나 자동차 수리를 맡기겠노라고 했다. 아직 미국인 수리공이 출근하기 전이라 뭘 고치라는 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해서 일단 자동차 열쇠만 받아놓았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문제는 낮에 생겼다. 근처에서 일을 하는지 점심때쯤 되어서 자동차 주인이 차를 찾으러 왔는데 운전석 문짝에 붙어있는 동전 통에 넣어둔 10불짜리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에 받아둔 자동차 열쇠를 수리공에게 넘겨준 것뿐인데 챨리는 전혀 돈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챨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손님이 딴 데다 10불을 두고선 착각을 했거나 둘중 하난데 챨리는 계속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흘끔거리고 손님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으르렁거렸다.

떨리는 것은 나뿐이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경찰이 와서 따지고 들면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고사하고 꼼짝없이 추방당할 판이 아닌가. 10불이 있으면 당장 내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덜덜 떨고까지 있으려니 누가 보아도 범인은 꼼짝없이 나였다. 그 판에도 아이크 박은 수습해줄 생각은 고사하고 경찰을 부르려면 부르라고 오히려 부추겼다. 도망이라도 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바로 옆에 사람들이 버티고 있는 그 판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다.

나는 계속 부들부들 떨면서 경찰의 심문에 답했다. 아침에 열쇠만 받아뒀다가 챨리에게 건네줬을 뿐이라고 그대로 말했다. 수리공도 자신은 차안에서  돈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우리말을 듣고 나더니 “아침에 이 사람한테 차를 맡기면서 거기 돈이 있다는 얘길 했오?”하고 손님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는 물론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 경찰은 “그렇다면 차에 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잖소”하고 가버렸다.

나는 그때 미국은 정말 제대로 된 나라라는 걸 배웠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도 그렇고 그 판에서는 약자인 내가 뒤집어쓰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결은 됐지만 나는 아이크 박이 너무 야속했다. 나 같으면 그까짓 10불을 줘서 해결할 터였다.  그나마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미국생활이 얼토당토않은 10불 때문에 끝장날 뻔한 순간이었다. 일삯도 안 주고 부려먹는 판에 그 정도 사정도 안 보아준 아이크 박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사람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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