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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한국방
화장실 벽을 넘어 월남에 입국하다
기사입력: 2010/11/28 [16:20]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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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보이스
땅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 구름을 뚫고 오른 비행기가 고도를 잡은 듯 안정되고 날아가고 있는지 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전벨트 표지등도 꺼지고 금연 표지등도 꺼지자 조종석에서 기장으로 보이는 나왔다. 객석 쪽을 점검하려는 듯 중앙 통로를 걸어나왔다.

  그런데 그가 내 앞에서 멈춰섰다. 내 얼굴을 보자 뭔가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낸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혀를 차는 시늉을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수경사에서 태운 사람이요?”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머뭇거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평소 남들보다 크게 말하는 습성이 붙어 있어서 상대가 소리를 낮추는 것을 보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음성을 낮춘 것인데도 기장의 음성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감색 공군 정복차림인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언뜻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지금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중에 서울시 경찰국장을 거쳐 부산시장과 내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종종걸음으로 조종석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왠지 꺼림칙했다. 잠시 후 기장이 중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중위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 사람은 사이공에 가면 안 되거든. 에이, 참. 진작 알았어야 되는데....”
  두 사람은 뭔가 나지막한 소리로 의논을 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 어디다 내려드리면 좋겠소?”
  “캄란이면 좋겠는데요?”
  기장이 말을 받았다.
  “캄란은 안 되고....거긴 전투기들이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니까.”
  “그렇다면, 글쎄요....퀴논이나 나트랑 아무 데나 좋습니다.”

  기장은 다시 중위에게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윽고 결론을 내린 듯 자기네끼리 중얼거렸다.
  “나트랑에 내려주면 되겠군.”

  나는 저으기 실망했다. 캄란에는 ‘비넬’이니 ‘RMK’, ‘알래스카 바지’, ‘필코’, ‘P&A’등, 내가 취직을 할 만한 회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트랑에는 한국인을 채용하는 회사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짜로 비행기를 타고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판국에 행선지에 정확하게 내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나트랑과 캄란이 1백여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급하면 걸어서라도 갈 수 있다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통에 몇백리 길도 걸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 까짓 1백여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트랑에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급유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연료공급을 받기 위해 기착한다고 핑계를 댔던 모양이었다. 급유를 하는 동안 중위가 좌석 중간으로 오더니 소리쳤다.
  “자, 화장실에 갈 사람 즉시 나온다! 시간은 십분이다!” 

  그러자 좌석이 어수선해지며 여기 저기서 군인들이 통로로 나섰다. 그 때 아까 기장이 데리고 왔던 중위가 내게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갔다가 거기서 돌아오지 말고 적당히 새쇼.”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선 사람은 전체 탑승자의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 열 댓명의 군인들 속에 묻혀 나는 나트랑 공항의 작은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손을 씻고는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 걸터 앉았다. 변이 나올리도 없었지만 그런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도 변기에 걸터앉아 같이 간 군인들이 볼일을 보고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대통령 전용기는 급유를 마치는 대로 사이공을 향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하나....”
   나는 화장실 속에 혼자 앉아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 것인지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깥 형편도 모르는 처지에 궁리를 한다고 해서 묘안이 떠오를리 없었다. 시끌벅적하던 군인들이 하나 둘씩 화장실을 나가고 조용해지자 나는 변기 위에 올라섰다. 화장실 중앙 벽 사이에 1미터쯤은 족히 될 만큼 공간이 있었고 그 벽 너머에서 월남어로 지껄이는 소리와 함께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기에 올라서서 벽 너머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 쪽도 이 쪽편과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 화장실이었다. 나는 잠자코 숨을 죽이며 기회를 기다렸다. 저쪽 변소에 있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벽에 턱걸이를 해서 기어올라 고양이처럼 사뿐 타 넘었다. 그리고 다시 변기 위에 걸터 앉았다. 월남인들이 서너 명 들어왔다가 볼 일을 보고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나는 태연히 문을 열고 나가서 그들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 쪽은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의 승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었으므로 나는 이미 월남에 무사히 입국을 한 셈이었다. 이민국 대신 화장실 벽을 넘어온 것이었다.

  사실 나트랑은 국제공항이 아니라 군용 비행장이었고 또 미국의 경우처럼 월남에 밀입국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붙들릴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어떤 경찰이 내 어깨를 낚아채며 “당신, 어디서 왔는데 어딜 가는 거요? 증명서 좀 봅시다.” 하고 붙잡을 것만 같았다. 등에선 식은 땀이 흘렀다.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 꼭 삼팔선을 넘는 것처럼 긴장이 됐다.

  월남은 당시 민간 여객기가 없었다. 민간인들도 군용기를 얻어 타고 여행을 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물론 폭탄이나 무기를 감추고 있을까봐서 몸수색을 철저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 한국 노무자들에겐 특별대우를 해줬다. 몸수색도 한결 수월했고 기술자라며 월남 안에서 출장 다닐 때 군용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나는 공항을 나가자 아무데나 쓰러져 잠부터 자기로 했다. 월남에선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외국인이라 할 지라도 길거리에서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야자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렸지만 끈적지근한 땀이 배어나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어떻게 캄란까지 갈 것인가 하는 궁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여권도 없었으므로 비행기를 얻어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버스를 타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버스가 캄란으로 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또 주머니속에는 먹고 싶은 것 못 사먹고, 마시고 싶은 소다도 안사먹고 아끼고 아낀 10불이 달랑 들어있을 따름이었다. 그 돈을 차비로 쓸 수는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자는둥 마는 둥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자 빈 속이 자꾸만 꼬르륵거렸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으니 뱃속에서 야단이 난 것은 당연했다.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시 월남에는 ‘유 에스 오’(USO)라는 기관이 있어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을 싣고 돌아다니며 무료로 나눠주었다. 미군 장교부인회가 운영하는 봉사기관이었다. 그들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손을 내밀면 커피와 도넛을 나눠주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나이는 들었지만 무척 정숙해보이는 백인 여자가 커피와 도넛을 주었다. 허겁지겁 도넛을 씹으며 커피를 들이마셨다. 그런데 커피가 너무 뜨거웠다. 입천정을 데인 것 같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뱃속에 뭔가 들어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 먹고 머뭇거리자 그 여자가 하나 더 먹겠느냐고 물었다. 마다할 리 없었다. 또 하나를 더 받아든 나는 선자리에서 도넛을 꿀꺽 삼키듯 먹어치웠다.

  배를 채우자 또 다른 걱정들이 몰려왔다. 캄란에 가는 여비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트랑 부두에 나가 하역부로 취직을 하려고 기웃거려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풀이 죽은 나는 지나가는 한국군 트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들을 붙잡고 수소문한 결과 캄란에는 보급부대가 있어서 새벽에  길에 나가서 기다리면 보급물자를 수령하러 그곳으로 가는 한국군 트럭들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같은 한국 사람이 손을 흔드는데 그냥 지나가는 한국군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가에 나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소위 히치 하이킹을 하겠다고 서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미군 트럭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간혹 차를 세우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어딜 가느냐고 물어본 후 캄란이라고 말하자 방향이 틀린다며 훌쩍 떠나버리기 일쑤였다. 또 설 듯 말 듯 브레이크를 밟아 열심히 뜀박질로 쫓아가면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대로 내빼는 차들도 많았다. 역시 동족은 동족이었다. 그리고 이역만리의 동족은 형제나 다름 없이 느껴졌다. 한참 후에 내 앞에 멈춰준 것은 한국군이 운전하는 트럭이었다.

  “캄란까지 가는데 좀 태워줄 수 있어요?”
  “기술자로 오신 모양이지요? 타세요. 마침 캄란까지 가는 길이니까.”
 건강해보이는 젊은 운전병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잽싸게 올라탔다.
  “출장 가는 길이면 비행길 타지 그러셨어요?”

  운전석 옆에 타고 있던 병장이 물었다.
“네...좀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요즈음 캄란은 사정이 어떻습니까?”
  “소강상태지요, 뭐. 어느 회사에 다니세요?”

  나는 그 병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기장이나 서울 거리에서 보던 경찰들의 표정과는 달라보였다.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막 도착해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병장과 운전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재차 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여권도 없이 비행기를 얻어타고 왔단 말입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내 얼굴을 번갈아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내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다. 비행기를 타게된 경위와 오는 동안의 일들을 무용담처럼 길게 늘어놓으면서 캄란으로 향했다.

  포장은 안 되었지만 자동차들이 다녀서 빤질빤질해진 진흙길을 한국군 보급차량들은 줄을 지어 캄란을 향해 달렸다. 길옆에는 어른 키의 두세 배나 되는 고무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등치의 군데군데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고 거기다 씨 레이션을 먹고 난 깡통을 달아놓아 흘러나오는 고무 액을 받고 있었다. 새삼 내가 월남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깡통을 매달고 서 있는 고무나무 숲을 건너다보면서 나는 “뭐든지 생산이 되자면 고무나무처럼 생채기의 아픔을 견디어 내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며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월남 처녀 랑과의 만남
 
  캄란은 나트랑보다 작은 도시였지만 공항은 더 규모가 컸다. 나트랑이 월남의 유서 깊은 도시 가운데 하나인 반면 캄란은 바다가 육지를 파고 들어온 지형 때문에 미군이 자리를 잡으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군인냄새가 짙은 도시였다. 그 군사적 필요에 따라 비행장은 나트랑보다 오히려 컸다.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섬 같은 이곳으로 미군들의 보급선이 들어와서 일단 짐을 모두 부려놓은 후 나트랑이나 다낭으로 실어 보내기 때문에 월남전이 터지면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 섬의 비행장 근처에 수진이라는 동네가 붙어 있었는데 원래 고기나 잡아먹고 살던 작은 어촌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군부대가 자리잡으면서 모습이 변모해가고 있었다. 한국의 기지촌 같은 곳이었다.

  6.25 전쟁 때의 부산과 흡사했다. 당시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어 대개 부대에 드나들면서 일을 했듯이 수진의 주민들도 군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물론 군인들이 있는 곳에는 으레 생겨나게 마련인 사창가도흥청거렸다. 한국군도 백마부대가 이곳에 주둔했다. 여자들도 그렇고 술집도 그렇고 미군과 한국군을 상대하는 무리로 나눠진 것은 한국의 미군부대 주변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곳은 묘하게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시켜 주었다. 어린 시절 나는 주로 미군부대 주변을 서성거리며 자랐었기에 수진은 아주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분위기가 익숙하다고 해서 누가 날 취업시켜 주겠다고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갈 곳도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캄란 비행장으로 가서 그곳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또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사흘을 버텼다.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유 에스 오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미군 장교부인들이 공짜로 도넛과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캄란에서처럼 또 다시 그들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일 거지처럼 남의 나라 장교부인회의 신세만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큰 결심을 하고 백마부대를 찾아갔다. 파월 부대는 미국에서 물자를 대어주니까 모든 게 넉넉하였고 부대원들의 인심도 좋았다. 한국 사람이 찾아가면 얼마든지 식사를 제공하였다. 식기도 물론 남아돌았다. 나는 군인들과 나란히 서서 밥을 타서 먹으며 자연 그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제대한 지 몇 년 되었다지만 같은 20대 청년들로서 금방 의기가 통했고,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만난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밥을 얻어먹으려 부대출입이 잦아지면서 군인들과 사귀려고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게 되었다. 군인들 가운데는 고참들도 많았다. 그 때만 해도 월남에서 현지 제대를 하고 취업을 하려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란 게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 중이긴 해도 여전히 취직은 힘들었다. 대학을 나오고도 하늘의 별따기이던 시절이었다. 현지에서 제대하고 취업만 된다면 그 귀한 달러를 벌어 금의환향할 수 있었으므로 젊은 시절 전쟁터의 돈 냄새를 맡은 고참병들에겐 입맛이 당기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래선지 그들은 나 같은 민간인이 나타나면 반가워하며 일부러 찾아와서 말을 붙이기도 했다. 월남의 취업전선은 어떤 형편인지, 무슨 일들이 할 만한지, 벌이는 얼마나 되는지 등 알고 싶은 것들을 물어왔다. 그런 장병들에게 내가 백수라는 사실은 다소 실망을 안겨주긴 했지만 그래도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정보 가운데는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 많았던지 귀를 기울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월남은 역시 무더운 나라였지만 내리꽂히는 남국의 태양열도 커다란 천막이 만들어주는 그늘 밑에만 들어가면 위력을 잃어버렸다. 바닷가여서 소금 끼가 실린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오고 군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시간이 잘도 흘러갔다.

  “사실은 나도 직장을 찾고 있는 중이라오.”
  “무슨 기술로 오셨는데요?”
  “목공일이죠. 군에 있을 땐 중대장 관사도 지어줬고, 남한산성 근처서 형제목공소를 열고 있었지요.”

  그러자 민사과 사병들이 반색을 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아저씨, 우릴 좀 도와주세요.”

  직장을 잡을 때까지 대민사업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주민 위무활동의 일환으로 집이 없는 주민들에게 주택을 지어주고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처음 상륙했었던 해병대가 너무 잔혹한 작전을 많이 해서 한국군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아 이를 수습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었다.

  부대 안에는 동원가능한 인력이 얼마든지 있었고, 자재도 공병대 창고에 쌓여 있어 집을 지을 줄 아는 기술만 있으면 준비가 다 갖춰지는 셈이었다. 목수인 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그야말로 안성마춤인 셈이었다.

  작전과와 민사과 소속 군인 몇 명과 함께 마을 시의원을 찾아가서 “우리가 집 없는 이들을 위해서 주택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급한 사람부터 추천을 하시오” 하고 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불편했던지, “얘, 랑아!” 하고 안쪽에다 대고 딸을 불렀다. 월남 처녀 랑에 대해서는 이미 부대에서 군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서 이름은 낯이 익어 있었다. 부대 통역으로 채용하자는 이야기도 나돌았었다.  
  “야!”
  월남말로 ‘네!’ 대답하며 랑이 나타났다.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다닥다닥 박힌 것이 아직 소녀 티가 남아 있는 통통하게 생긴 처녀였다. 예쁘장한 용모였다. 첫 인상부터 귀엽고 친밀감을 풍겼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대뜸 한국인이란 걸 눈치채고 “안녕하세요!” 하고 또렷한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너 이 따이한들 말을 좀 통역해봐라. 우릴 도와주려고 찾아 왔단다.”
  그러자 랑은 수줍어하면서도 까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면서 열심히 시의원과 나의 대화를 통역해냈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우리말을 잘하니까 통역으로 채용하려는 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부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군인들과 접촉이 잦다 보니 우리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트남의 그늘은 한국으로 치면 우물가나 다름 없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각종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따이한 군인들이 집을 지어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시의원이 누구네 집을 지어달라고 순서를 정해주면 작전과에서 사역병을 내어주고 공병대에서 자재를 대줘 동네에 나가 집을 세웠다. 집이라야 기둥 세우고,  마루 깔고, 벽은 베니다판으로 틀어막는 정도였다. 지붕은함석으로 덮으면 그만이었다. 한 채 짓는데 사흘 남짓 걸렸다. 더운 나라이므로 난방장치는 물론 필요 없고 그렇다고 냉방장치를 할 것도 아니어서 집짓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한 달 사이 새 집이 열 채나 세워졌다. 물론 나나 군인들이나 그 집들을 짓는다고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어서 하루에 네댓 시간도 좋고 두세 시간도 좋고 형편이 되는대로 일을 했다. 특히 내 입장에선 틈틈이 직장을 구하러 쫓아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집주인이나 주민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해서 매우 불편했다. 그러자 부대에서는 한국말이 통하는 랑 처녀를 채용하여 통역으로 내게 붙여주었다. 통역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서너 달 동안 지내는 동안에 나는 그녀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랑의 아버지인 시의원 집은 특별히 이층으로 지어주었다. 물론 랑의 부탁과 시의원이라는 신분을 고려한 탓이었다. 집이 다 지어지자 나와 랑은 랑의 방에 가서 월남어와 한국어를 서로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 때 배운 월남어는 후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같은 동양 말이라서 그런지 영어보다도 훨씬 쉽게 느껴졌다.

  랑의 어머니는 소위 ‘양키 물건’ 장수였다. 그 때의 인연 때문에 후에 나와 거래를 트고 서로 돕는 사이가 되었다.

  집짓는 일을 계속하면서 비넬이나 알엠케이 같이 한국인 파월자들을 많이 고용하는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일자리가 없나 수소문도 하고 한인 취업자들을 만나 정보 얻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누군가가 회사를 소개시켜 주었다.
 “내사 마 강씨가 좋아서 그런긴데, 알아보니까 저 해안 맨 끝에 있는 알래스카 바지라고 있다고 합디다. 그기서요 사람 뽑는다는얘기를 들었심더. 한 번 가보이소....이국 땅에서 서로 돕고 사는기 도리가 아니겠능교....”

  경상도 어디서 왔다는 청년 하나가 말을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서 <알래스카 바지 운수>(Alaska Barge Transport Inc.)라는 미국회사를 찾아갔다. 미 해군 용역회사인 이 회사는 함정 수리, 수송, 보급품 조달 등을 맡아서 하는 회사였다.  
 
  정문에는 필리핀 사람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경비원이 꼬치꼬치 용건을 따지며 들여보내 주지를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필리핀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으로 복무했던 조선인들 가운데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못된 짓을 많이 해서 그렇다기도 하고 모습이 비슷해서 일본과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면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믿기지 않았다. 파월 기술자들이라고 해봤자 제대로 배운 사람은 드믈었다. 오죽하면 전쟁터로 돈 벌러 나왔으랴.

  나는 경비원에게 면회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그 경비원은 이름을 대라며 한사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우겼다. 이름은 모르지만 면회를 해야겠다고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노라니 마침 창문을 내다보던 인사과장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들여보내 보라고 지시하자 그 필리핀 경비원은 멋적었던지 손짓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는 한국 여인과 결혼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내게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나요?”
  그는 도와주겠다는 표정이었다.  “목수 일은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목수 자린 빈 데가 없는데.....”

  나는 아차 싶었다. 오랜만에 잡은 기회를 무산 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트레일러도 운전할 줄 압니다.” 하고 말했다. 회사 안 한쪽에 서 있던 로우보이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우보이는 군에 있을 때 끌어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일을 하시오. 우선 여권을 주고. 당장 수속을 밟으시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권이 없으면 취직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예상을 하긴 했지만 나는 여권이고 뭐고 내 신분을 증명할 만한 아무 서류도 없는 밀입국자 신세였다.

  “저,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머뭇거리자 인사과장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의심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하긴 전쟁터에 밀입국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실은, 다낭에 있을 때 포격을 피해 급히 나오는 바람에 서류가 가방이 몽땅 날아가 버렸거든요.”
  “그거라면, 뭐, 그럼....., 어떻게 한다....?”

  그는 잠시 무슨 묘안이라도 짜내는 것처럼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나를 돌아다보았다.

  “오케이, 그럼 나중에 보완하기로 하고 우선 이걸 쓰시오.”

  신상명세서를 써내고 나서 나는 곧바로 취직이 되었다. 운이 좋았다. 인사과장을 만난 덕분이었다. 그는 부대 안에 나의 숙소를 배정해주고 다음날부터 나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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