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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빙사절의 보스톤· 뉴욕 시찰과 미 조야의 환영
제2장 보빙사의 미동부 시찰· 환대와 서구문명 수용의 두 유형
기사입력: 2009/11/13 [10:48]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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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모
 
 
▲   1883년 9월 보빙사절단이 유숙했던 호텔   © WorldAnew
제2장 보빙사의 미동부 시찰· 환대와 서구문명 수용의 두 유형


   1) 보빙사절의 보스톤· 뉴욕 시찰과 미 조야의 환영

    국서 제정식이 끝난 후 사절일행은 뉴욕시와 센트럴 파크의 관광을 하고, 해군장관 체들러의 특별배려로 폴 리버 선 (Fall Rive Line) 기선회사의 브리스톨 (Bristol)호를 타고 오후 보스톤으로 떠났다. 이들의 보스턴 방문은 미국문화의 발상지와 미국산업의 시찰이 주목적이었다. 사절은 메이슨과 포크의 안내로 밤새도록 대서양 연안을 항행하여 9월 19일 새벽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외구박람협의회의 사무총장 노튼(C.B. Norton) 장군과 벤담 호텔 주인 월코트 (J.W. Wolcott) 의 영접을 받았다. (Boston Post, 9/21/1883)  메이슨 중위의 소개 후 벤담호텔에 여장을 풀자 호텔주인 월코트는 한국사절을 환영하는 예우 표시로서 태극기를 계양했다. 이 또한 한국의 국기가 미국에서 계양되는 첫번째의 일이었다 (Boston Daily Globe 9/19/1883). 실은 이 계양식이 있던 불과 몇달 전인 1883년 3월 6일에야 태극기가 정식으로 한국의 국기로 제정되었으며 이러한 태극기를 휴대하고 와 미국에서 계양하도록 하였기에, 이는 사절들의 우국충심과 함께 미국 산업인들의 우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 언론들도 이점을 유념하는 듯했다.

    1871년에 건축된 이 벤담호텔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월코트 예비역 대령이 1880년 구입 후 백열전등을가설하는 등 대수리를 한 현대적인 건물로 보슨턴의 유서 깊은 명물의 하나였다. 사절들은 이 호텔에서 조반을 한 후, 노튼 사무총장의 초청으로 오전 외국박람회  (Foreign Exhibition)를 방문하고 이어  브래들 (Bradle) 총재의 안내로 이번에는 미국박람회 (American Exhibition)를 방문하며 구미의 선진과학문명의 발전상에 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절들은 한국에 필요한 광산채굴장비, 농기구와 면직물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Boston Herald, 9/20/1883; Boston Daily Globe, 9/19/1883).  사절들은 마차를 타고 보스턴 시가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브루클라인의 코리 힐 (Brookline, Corey Hill) 과 그 밖의 명소들을 관광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보스턴시장 파머 (Palmer) 의 예방을 받았고 밤에는 또 다시 외국박람회에 초대되어 가 휴대하여 온 한국의 몇가지 표본의 토산품들과 한국의 도자기 화병 주전자 등을 출품하기도 했으니 이 또한 한국으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경이한 것이었다.  여하튼 두 박람회에 참석하며 한국사절들은 개회의 필요성을 더 느끼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특히 목화종자에 관심을 가지며 뒤에 귀국시 실제로 최경식이 목화종자를 구입하여 한국 농무목축시험장에서 시험하여 좋은 결실을 가져온 것은 귀한 교훈이었다.  두 박랍회에서 민영익은 큰 충격을 받고 한국에서도 국제박랍회를 개최할 뜻을 밝히고 미국에 박람회전시용 출품할 구입하는 절차에 관한 의론까지 했으나 국내의 정치적인 불안으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New York Times, 10/23/1883)

    두 박람회에 참석한 후 사절일행은 미국문명의 발상지라 할 보스턴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인 명승지와 유적지들의 시찰을 겸한 관광에 나섰다. 사절의 일원이던 유길준은 보스턴을 다음 같이 소개한다. “이 도시는…국내외 무역이 번성하고 상선의 출입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기차 철로도 사방으로 통하여, 화물을 수송하는 방편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또 물품을 제조하는 기술이나 이론적인 학문에 있어서도 미국에서 으뜸이며,   면방직이나 조선업에도 첫째를 다툴 곳이 없다…백여 년 전 이 나라가 독립하던 떼에 이 도시 시민들이 그 의논을 처음 내세우기 시작하여, 전국의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영국의 압제를 벗어났따. 그러므로 옛날  충의로운 지사들이 전쟁하던 엣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3척의 토성도 엣터가 완연하다…미믹국의 교육 규모가 대단히 번성한데, 특히 이 도시 시민들이 학문에 힘써 휼륭하고 위대한 학자들을 잇달아 배출하였으므로, 미국 사람들이 이곳을 미국 문물의 주심지라고 부른다. 이 도시의 어린아이까지도 언행과 지식이 남달라서, 먼 곳으로 나다니게 되면 지나던 사람들까지도 이들의 몸가짐과 말을 보고 반드시 ‘보스텉 시민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 부모의 이름을 묻는다로 한다.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는 비콘 가(Beacon St) 다. 이곳에 자리잡은 공원도 역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울긋불긋한 다리나 배들이 은은히 비치는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신선 세계를 그려 낸 듯하다…멀리 바라보면 챨스 강의 긴 줄기가 앞으로 급이쳐 흐르고, 가까운 마을에 점점이 찍힌 나무들이 사방에 흩어져 한적한 전원의 운치를 나타낸다. 도시의 웅장한 건물들이 호사스럽게 늘어선 모습은 웅대한 도시의 장관을 시원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공원 서쪽에는 식물원을 마련하여, 꽃들의 아름다은 향기가 사람들의 코에 와 닿는다. 태평양회당은 십여 년 전 이 도시에서 대회를 열었던 큰 건물이다,..시청에서 120만 냥 비용을 먼저 내어주며 시민들의 즐거운 일을 권장하였다. 부유한 자들이 다트어 돈을 내며 굉장한 건물을 세우고 여러 나라의 가수와 약사들을 초청하여, 1872년 5월 13일 태평악 대회를 열었다. 악사가 1,500명이고, 모여서 노래한 자들이 1만 5,000명이 되었다. 그 모임의 성대함은 고금에 보기 드물었으며, 상등 여가수의 급료가 일 주일에 30만 냥이나 되었다고 한다.”(서유견문,  pp .430-432). 한 도시의 규모나 아름다운 묘사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역사까지를 더듬어 보지 못한자들이 상상하기에 족한 관찰을 했다. 이에 저자는 일부러 유길준의 긴 글을 인용하며  사절들이 이국 땅을 방문 시찰하며 자신의 나라에 대한 꿈도 깊히 간직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으면서 소개한다. 
 
     사절들은 9월 20일에는 벤담호텔 주인 월코트의 초청으로 그의 유명한 캔턴 (Caton) 에 있는 월코트농장 (Wolcott Farm) 을 방문했다. 각종 농기구와 함께 처음보는 온실재배의 식물, 각종 가축의 목장, 목초를 썰어 가축사료용으로 저장하는 원탑형 사일로 등 모두가 흥미롭고 배울만한 것들이었고, 최경석은 귀국 후 미국의 근대식 영농기술을 한국에서 실험하기도 했다. (Lowell Weekly Times, 9/28/1883)  그 사이 일행들의 채도는 아주 겸소하고 미국인들 못지 않게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이 보이며, 미국식사에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미국제 시가도 피웠다. 또한 밤에는 보스톤 극장에서 연극공연도 즐겼다.

   9월 21일에는 보스턴 북쪽에 있는 미국 최대규모의 공업도시 로우웰 (Lowell) 시도 방문하여 방직공장, 기계제작소, 방직기계와 엔진제작 공장과 제액공장도 시찰했다. 또한 그 밖에도 양탄자 직조과정과 편물 내의 양말 등의 제조과정을 견학했다. 모무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시찰이었다. 9월 22일에도 이들은 주정부를 방문하여 버틀러(Benjamin F. Butler 지사의 영접을 받고, 이어 보스턴 시청을 방문하여 시정의 모습과 시내의 공립하교도 시찰했다. 끝으로 사절들은 보스턴지방의 명문가의 자손인 로우웰가에서 특별한 향응의 송별연을 받고 공식적인 방문을 마친 후 뉴욕으로 돌아와 다시 피브스 애비뉴 호텔에 유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사절은 미국문명의 상징이라 할 뉴욕시의 여러가지 명소 시설 등을 본격적으로 시찰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이른 아침 사절은 뉴욕시 상공인들과의 회담을 마치고 부르크린의 해군공창을 방문하여 어프셔(John S.Upshur) 해군 제독과 포터 (E.E. Potter), 미드 (Meade)  함장 등의 영접을 받으며  콜로라도         (Colorado)  호 함상으로부터 15발의 예포가 울리는 중에 사절은 공창 안으로 들어가  각가지의 시찰을 했다. 아프셔 제독의 관저에서 오찬을 나눈 이들은 계속하여 시찰을 한 뒤, 밤에는 연극을 관람했다. (New York Times, 9/25/1883). 9 월 25일에는 로우 브러더스, 프레이자, 케스웰, 포그, 아스핀홀 상사 (Low and Brother, Fraser and Co. Casewell and Co. Fogg and Co, Howland and Aspinwall) 등의 뉴욕지방의 실업계 대표들의 한미수교의 비상한 관심 속에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특히 프레이저는 한국교역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그는 1994년 1월 17일 뉴욕주재 한국명예총영자가 되었다. 당시는 아직 워싱턴에 상주공사가 없었기에 그는 사실상 주미한국공사의 대리역을 한 편이다. (H. Allen, Korea: Fact and Fancy, p.165).

     사절은 9월 25일에는 뉴욕병원 (New  York Hospital)을 방문하며, 현대적인 병원의 규모나 시설들과 호텔과도 같이 청결하고 아름다운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 간호하는 것을 보며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이어 웨스턴 유니언 전신국 (Western Union Telegraph Office) 을 방문하여 먼 도시에 보내는 통신문 전송이 즉각 회신으로 돌아오는 것에 놀랐다. 또한 우편물 등을 전달하는 기송관의 작동도 신기하기만 했다. 종이 쪽지에 글을 써 보내면 튜브를 통해 곧바로 반송되어 오는 시설이었다. 더욱이 에퀴타불 빌당을 방문하여, 발전기로부터 전기불이 커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New York Times, 9/26/1883). 전기는 악마의 힘으로나 가능하다고 여긴 한국의 사절들이 전기 발생의 과정과 그 사용방법을 알게 되면서, 비로서 전기의 실용성을 높이 평가하고 장차 한국에서도 전기사용을 희망했다 (New York Herald, 10/15/1883) 하기에 우리의 생각이나 후진성이 얼마나 뒤진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의 보빙사절은 계속하여 시간이 허락하는 한 지침이 없이 발전된 미국의 문물 제도 등을 더 보고 시찰하며 배우려 최선을 다했다. 때로 이들을 안내하던 미국의 메이슨 대위는 피곤하여 쉬고 싶어도 사절의 열성에 멈출 수 없었다는 고백은 이러한 한인 사절들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절들이 미국 은행을 방문했을 때 금고를 보이며 여기에 재산을 맡기면 아무 염려를 할 필요도 없이 안전하다고 하자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지키는 사람이 없이 어찌 그런 일이 안전보관이 가능한가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어 보석상 우체국을 시찰하며 대형 다이아몬드를 보면서 신기하고도 의아할 뿐이었다(New York Times, 9/26 & 27/1883) 하니, 미쳐 생각도 상상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기에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9월 26일 사절들이 가탈프스 (Catalps) 호를 타고 아일랜드 (Island)에 있는 뉴욕지사를 예방했을 때 부두에는  태극기가 휘날리며 휩플 (William D. Whipple)  부사령관과 40여 해군장교들이 나아와 영접했다. 보빙사 도미 후 두번 째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반가운 광경이었고, 뉴욕 헤랄드의 보도에 따르면 태극기의 위아래를 구별하지 못한  해병대들이 태극기를 거꾸로 달아 휘날리고 있었으나 웃음보다는 감격이 앞섰다고 한다. (New York Herald. 9/27/1883).  여하튼 사절이 콜럼버스 보루에 도달했을 때엔 제5포병부대에서 이들을 환영하는 17발의 예포가 성벽에서  발사돼고 군악대의 환영연주가  울리며 푸른 하늘에선  포연을 둥근 원을 그렸다 하니 경이로웠다고 한다. 계속하여 잭슨  Jackson) 장군이 지휘라는 군대사열식이 있었고 한국사절은 사열대에 올라 군악대에 맞춘 미군들의 행진을 사열을 하였기에 그 감격은 또한 무한했다고 한다. 열병식 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영접에 나오지 못한 핸콕 (Hancock) 사령관이 관저에서 오찬을 준비하여 접대하고 군악대들은 한국의 가곡을 연주했다 하기에 그 환대와 정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한다. 민영익도 이때 포병대의 도움을 받어 처음으로 대표를 발사하는 경험도 했다고 뉴욕 헤랄드는 전한다. (9/27/1883)

    이들은 이어 뉴욕 센트럴 허드슨 리버 철도회사 (New York Central and Hudson River Railroad Company)와 그 소속 곡물창고를 방문하고 저녁에는 어프셔 제독과 에디슨 (Edison) 시장의 안내로 카지노에서 연극공연을 관람했다. 보스턴과 뉴욕의 여러 곳을 방문하던 사절은 미국여자들과 그들의 옷차림을  눈여겨 보았으며 이를 서광범은 이렇게 평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여자와 중국여자를 보아왔다. 그러나 미국여자는 어느 나라 여저보다 더 아름답다. 대부분의 미국여자는 검은색 옷이나 또는 프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면  흰색옷을 입고 다닌다. 여자들이 모자들을 쓰고 다니는데…뒤로 제쳐쓰는 모습이 훨씬 멋이 있어 보인다.”(New York Herald, 10/15/1883).

     9월 27일에는 아놀드 (Arnold) 와 그 밖의 백화점 회사들을 시찰하고, 이어 뉴욕 소방서를 방문하여 밴 코트(Van Cott) 소장의 환영을 받으며 여러 소방장비들을 관람했다. 이때 갑자기 화재경보의 종이 울리고 말이 걸어나오며 소방대와 소방차가 큰 엔진소리를 내며 신속하게 동원되는 것을 보고 사절들은 실제로 화제가 난줄 알고 당황했으나 이는 그들에게 보여주려는 시범이었다. (New York Times, 9/28/1883).  엔진부대 소방소를 시찰할 때  방문록에 서명을 요구하자 민영익 대표로부터 붓글씨 쓰는 방법으로 정중하게 쓰기에 몇분씨이 걸리고 전원이 서명을 마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수행한 미국 안내 장교인 메이슨과 포크는 간단하게 서명하는 것을 보며   사절들은 “글쓰는 것도 이들은 얼마나 빠른가”며 찬사를 아끼지 안했다.  한 비서관이  소방박스 (Fire Box) 를 열고 민공사로 하여금 버튼을 누르게 하자, 신호가 울리며 2분만에 소방차가 도착하여 연기 뿝는 화재장소에 물을 뿜어 진화작업을 수행했다. (New York Herald, 9/28/1883). 

    사절들은 이어 뉴욕시청으로 안내되고, 에디슨 시장은 이들을 환영하며  오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시장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보이게 되어 기쁘다”며 “한국민과 뉴욕시 상인간의 통사교역과 정치관계가 유쾌하고도 호혜적으로 유지 발전하고, 귀하게 출발한 양국관계가 평화롭고 영속적인 행운을 가져오기를 희망한다”는 환영사를 했다.이에 민공사도 환영을 감사하며 “특히 뉴욕시의 관광을 통해 무한한 감탄을 금할 수 없으며, 통상조약으로 교류가 열리기 시작한 것을 기뻐합니다. 푸트 주미공사는 우리가 미국에 가면 친절한 영접을 받을 것이라 귀뜸했으나 우리는 그보다 더 큰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양국 국민은 우의와 통상으로 ‘한 가정’ (one house)에 사는 ‘하나의 국민’ (one people) 이 되아주기를 비린다…”는 답사를 했다. (New York Herald. 9/28/1883).

    이어 사절은 ‘뉴욕 헤럴드,’ ‘이븐닝 포스트’ (Evening Post) 등의 언론사들을 방문하고 신속한 신문제작 과정을 보며 감탄했다. 특히 ‘뉴욕 헤럴드’사에 들렸을 때엔 ‘국서 제정사’ 등  한글본을 9월 10일자의 표지로 하며 특별기사로 게재한 것을 감사했다. 차제에 민공은 “한국도 이러한 활자를 가지고 있으며 인쇄과정은 다르다. 200여년 전 한국국왕은 수많은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철활자를 사용해 오고 있다”며  자랑했다. (New York Herald, 10/15/1883)

     신문사 방문을 마친 사절은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 육군사관학교를 가려고 역으로 나왔다. 그리고 특별열차 편으로 웨스트포인트에 도착했다. 이들은 9월 28일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메리트 (Merritt) 교장의 환영을 받았다. 육사 연병장에는 색색의 사모관대를 입은 한국보빙사를 맞이하려 사관생도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절을 보며 사관생들은 “사절은 왜 그들의 남편들을 동반하지 않았는가?”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댜양한 색깔의 관복을 입었기에, 귀부인의 일행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이날 메리트 교장의 당부를 받은  전속부관은 친절하게 안내하며 육사생의 교육내용, 각종의 실험실을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천문관측기구와 폴탄수집품 등은 인상적이었고, 미술부에 진영된 석고상에는 아주 놀랐다. 연병장에 나오자 오거 (Augur) 대위가 지휘하는 기병대의 퍼레이드가 준비되고 사절들이 좌정하자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큰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비호같이 달리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이떼 육사 궁악대는 한국 가곡 (Corea Opera) 의 한곡을 연주해었고, 기병대의 퍼레이드를 관람한 민공은 그들을 향해 “태양신의 빛이 그대 미국 아들 용사의 머리 위에 찬연히 빛날지어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절은 일본어로 작별인사를 하며 육사를 떠나 선창으로 나와  대통령의 전용 요트 디수팻취 (Despatch) 호를 타고 수도 워싱턴으로 향했다. (New York Herald, 9/29/1883).   

2) 사절의 수도 워싱턴 방문과 환대

     뉴욕을 떠나온 보빙사 일행은 9월 29일 수도 워싱턴으로 돌아와 외국의 귀빈들이 묵던 알링톤 호텔에 투숙했다. 포토맥 강과 애너코스티아 강의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요충에 자리잡고, 이 나라 첫 대통령 위싱턴의 이름을 따 수도명를  삼은 미국 정치의 중심인 역사적이며 아름당운 전원의 도시를 다시 밟는 한국 사절일행의 감회는 실로 컸다. 더욱이 그동안 이 대국의 미국이 이제 겨우 서방세계에 문을 열고 수교의 첫 걸음을 내딧는 일단의 젋은 대표들에게 그토록 정중하고 넘치는 환대를 하며 맞아주는 친절을 생각하면 그 고마움은 한층 더했다. 이는 사절 모두가 느끼며 서로 이야기 하던 하나 같은 마음들이었다.

    사절들이 미국의 서울 워싱턴을 보며 자연의 경관이나 미국인들이 계획하여 건축한 워싱턴을 감탄하며 보던 심정을 유길준은 그의 ‘서유견문’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그린다. “질펀히 흐르는 강물은 거울을 펴쳐 놓은 듯하고, 많고 빼어난 봉우리는 그림폭을 펼친 듯하여,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관청과 민가의 건축과 배치가 아름다움을 서로 아투고 규모를 반드시 지켜서, 유리와 울긋불긋한 빛들이 여롱하게 비친다. 사이사이에 공원을 만들어 기이한 꽃과 풀들을 심어 기르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는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다. 길 양 옆에는 나무가 나란히 줄지었는데, 큰길의 너비가 160척이 되는 곳도 있다. 차와 말이 그치지 않고 화물이 쌓여 있어, 그 변화한 모습은 참으로 큰 나라의 서울답다. 그러나 주민은 15만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된 풍속은 태평한 기상을 나타내고, 아름다운 산천은 한가롭게 즐기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사철 끊임없이 드나들고 …포토맥 강에 나무다리가 두 군데 가설되었는데 , 오른쪽 다리에는 기차가 오가는 철로가 깔려 있고, 왼쪽 다리에는 차와 말과 행인이 건너다니게 되어 있다. 그 길이는 대략 우리 나라 이수로 6리가 넘는다.”

    유길준은 국회 의사당에 관한 외관만이 아니라 그 역할까지도 겸하여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 굉장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위용을 나타내는 국회 의사당은 “정치 법령과 법률을 심의 견정하는 곳”이다.  흰 돌로 온 건물을 건축하고 기둥과 벽, 둥근 탑의  지붕까지도 돌로 만들고 그 위에 ‘자유의 여신’이라는 동상을 앉혔다. 좌우에 날게 모양의 회랑 둘려 있으며 이 또한 흰 돌이며, 그 비용은 당시의 한화로 2억 4,100만양이나 된다. 그는 건물의 용도까지도 설명하며 미국 조상들의 깊은 뜻을 치하한다. 서쪽으로 정면을 삼은 의사당의 오른쪽에는 상원 의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하원 의사당이며, 가운데는 “대통령의 논사실과 대심원을 설치했다. 또 도서관을 마련하여 고금 정치 법령의 기록을 보관”하고 한쪽에는 각 관청 관리들의 사무실과 의원들의 응접실이 마련되어 있다. 각 청사의 벽에는 옛 미국민이 고생하던 모습과 독립 전쟁을 하던 전황, 농민들이 부지러히 애쓰는 퐁속들을 그려 심원한 뜻을 나타냈다며 이 나라 선조들의 깊고도 원대한 뜻을 칭송한다.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도 흰 돌로 된 특수 건물일 뿐아니라 관저의 위치가  재무성 국방성 국무성 사에 자리하고, 정원 연못까지도 계획적으로 설계하여 만들어 그윽하고 한가한 운치와 맑고 산뜻한 분위기를 갖취게 했다. 아침 낮에 사람들의 출입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기에, “참으로 산천의 즐거움을 국민들과 더불어 누리자는 뜻”이다. “미국의 법률이 너그럽고 인심도 순후하여, 대통령의 관저라고 경비하는 사람을 두지 않는” 것을 보며,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상하의 구별이 없이 온 국민이 평등한 입장에서 나라 일을 즐기며  함께 하려는 배려와 실천이 부러움을 넘어 경탄케 하는 느낌이다.

    유길준이 워싱턴에 세워진 기념비나 동상 하나에 대해서도 그 세원진 경위나 역사적인 의미와, 미국인들의 정신을 찾으려 하기에 그의 묘사와 의도를 조금만이라도 더 살피며 소개하고 싶다. 말 위애 앉은 잭슨 (Jackson) 의 동상을 보며 빛나는 공적을 세운 그를 미국민들이 잊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하여 국민들의 의기를 고취하고 습속을 장려한 것”에 그는 경의를 표한다. 또한 대통령 관저 앞에 세운 500척이 넘는 높은 흰돌기둥의 워싱턴의 기념비가 구름까지 닿고,  벼락을 한번 맞은 것을 회상하며,  벼락이 죄 있는 자를 천벌하는 것이라는 한국인의 속설을 비판하며 워신턴이 무슨 죄가 많아 벼락의 천벌을 맞았겠느냐 묻는다. 구가의 왁스 박물관 (National Historic Wax Museum) 에 진열된 왁스로 된 여러 상에 대해서도 유길준은 치밀한 조사와 그 경위를 해설해 준다. 저술이나 공예, 그 밖의 새로 만든 것에 의사당에 그 사유를 알려 전매권을 창구하고, 그 견본을 이곳에서 전시한다. 공에의 솜씨에 따라 포상의 등급이 주어지고  재주를 등명하며 전매권이 허가된다. 원내의 배치도 몇 부분으로 나뉘이고 질서정연하다. “기선 기차 전기기계 및 학과에 관한 것들은 한 가지 빠진 것이 없으며, 또 일상적으로 쓰는  여러 가지 미국과 공예에 관한 것들도 모두 나열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나 화장 도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 낸 것들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는 통찰이다.

     정치만이 아니라 과학과 예술, 공예품이나 장난감 하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를 기려 국민의 여러 재주들을 장려하는 뜻을 높이 산다. 좀 장황한 소개같으나, 정치 권력을 위해 국왕에게 가까이 하려 음무 술수나 쓰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 되고, 타락한 조정은 나라의 발전이나 국민의 복리 안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만을 챙기는 한말 습속의 폐쇠적인 나라에서 온 정관의 대표들이, 미국의 기념비나 동상 하나를 보면서도 이러한 통찰과 교훈을 가지는 것을 보며 그 자세가 아름답기에 소개하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100 수십년이 지난 오늘의 재미한인들이  잠시 다녀가면서도 느끼고 배우던 우리 선조들의 통찰에 얼마나 버금갈 것인가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후손된 우리 재미한인들도 우리의 유산을 더 아끼고 살리되 발붙혀 사는 미국 땅 조상과 이 나라 여러 종족들의 장점들을 배워, 이 나라에서는 물론 멀리 있는 한반도의 동족들과 온 누리에  흩어사는 모든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한민족에게도 널리 알리며 선양하고 싶다.    

     사실 워싱턴으로 다시 온 사절은 방문이나 시찰보다 한미수교와 국서 제정식을 마치고 앞으로의 한미관계의 원활함과 미국의 도움이 절실한 것들을 미국의 정관가와 협의 요청하며 확인하는 후속 조치 등에 힘써야 할  중요한 기회였다. 이에 사절들은 도착한 날부터 매일 낮에는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재무부 교육부 농무부 와 금고국 조폐국 우정국 등 연방정부를 방문하여 견학 시찰 협의했다.  한미관계 협의에 주요 부처에는 여러 번 방문하며 특히 국무부에는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프릴링하이젠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의 정치개혁을 위해 의논하며 정치외교담당의 외교고문, 군사개혁을 위한 군사교관과 근대식 교육을 위한 교사 파견을 요청하며  국무장관도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New York Times,9/29/1883).

     홍영식은 미국의 부처를 시찰하며 연방정부의 행정기구 정부조직 정치제도와 삼권분리, 관료의 임무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며, 그는 귀국 후 정치개혁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할 뜻을 보였다. 이런 결의가 홍영식과 사절단의 몇명이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하였기에, 갑신정변은 사절단의 미국방문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다. 최경식은 농부부를 방분했을 때 각종의 종자 농약품 농기구 농업 팜풀렛 등을 만히 구입하며 앞으로 한국에 여러가지의 종자를 보내달라 주문하기도 했다. 사절들의 밤은 그동한 보스턴 뉴욕 등의 시찰에 대한 의견교환과  방문동안에 느끼고 생각하며 배운 것들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사절들을 보는 워싱턴의 관리나 시민들이 그들의 외모나 복장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는 점에는 다른 도시에서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각양각색의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워싱턴 거리와 공원을 거닐고 펜실바니아 대로를 마차로 왕래하는 모습이 신기하게만 보인 듯하다. 피부빛이 약간 거무스름한 이들 외국 사절들의 정중한 행동거지는 걸어가는 미국인들의 발을 멈추게 하고 부처의 공무원들은 일손을 쉬며 쳐다보게 했다. 상당한 미국인들은 사절들을 보며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경망하지 않고 의젓한 사절들의 거동이 미국인들의 호기심만이 아니라 저들을 정중하게 대하게 했다기에 자못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사이 보스턴에서 두 개의 큰 박람회을 직접 참가하여 큰 인상을 가진 민공사는 국무부 당국과 한국에서의 국제박람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교섭했다. 이는 대오교섭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미국 정부에서 박람회에 제출도 출품하여 달라는 주문까지 하며 미국측도 꽤 적극적인 호응과 동의를 했다. (New York Times, 10/23/1883).  민공사와 사절들은 한국에서의 국제적인 박람회는 대외 편견을 타파하고  대외교섭을 촉진하며 한인들에게 외국제상품들을 보여줌으로서 한국의 개화실천에 진일보의 계기가 될 것으로 맏었기에 큰 기대를 했다. 그러나 보빙사 귀국 후 한국에서의 수구사대당의 집권으로 이런 계획은 수포화 되고 만다.

    한편 스미소니언 미국 국립박물관은 한국의 의약품수집을 박물관에 전시하겠다는 뜻을 사절에게 전했기에, 민공사는 몇가지 안되는 약초와 약뿌리기만 전시를 위해 출품했다. 그리고 미국정부가 정식으로 요청한다면 한국의 기타 토산품들을 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한국의 보빙사절은 미국정부의 국빈으로 대접을 받았기에 미국에서의 체재비용은 미국정부가 부담해 주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비가 부족하자 민공사는 한국정부가 지불보장하는 약 3,000불의 환어음 발행의 문제를  미국측과 교섭했다. 그 결과는 확실치 않으나 민공사 일행의 6개여 월에 걸친 세계일주항행비로 사용되지 안했는가 추론된다. 여하튼 공식일정을 마친 사절들은 한결같이 미국 정부나 조야가 환대하고  미국언론들도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을 기사로 한국과 한국의 사절들에 대해 소개하여 준 사실에 대해 만족하며 감사를 표했다. 특히 미 국무부의 프리링하이젠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워싱턴 등지의 시장과 정관계 인사들, 뉴욕과 보스턴의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최선을 다해 영접 안내하며 후대하여 준 일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사절들은 하나같이 깊은 감사를 했다.

   더욱이 사절이 공식일정을 마치고 10월 21일 백악관을 예방하여 아더 대통령에게 고별인사를 하는 사절들에게 미 대통령은 또 하나의 큰 선물을 더했다. 그는 프릴링하이젠 국무장관에게 특별지시를 내려 귀국하는 한국사절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국무장관은 해군장관에게 해군함정 트렌턴호를 파견하여 이들이 대서양을 경유 유럽을 거쳐 한국까지 호송하게 했다.  항행비용은 미국측이 부담하기로 하며 미국의 해군 비상지출금에서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국무장관은 한국의 푸트 공사에게 상세하게 통고했다. 이는 실로 파격적인 후의의 조치였다. (FRUS, Corea (1883), p.125, Frelinghuysen to Foote, 11/12/1883) 사절은 센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워싱턴에서 작별인사를 고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이와같은 미국의 치밀하고도 정성스런 환대를 받으며 귀국하게 된 것이다.

 3)서구문명  수용의 두 자세와 한국에 미친 영향

    이런 호의로 한국사절은 두 조로 나뉘어 민영익 대표와 서광범 변수, 해군무관 포크 등은 트렌턴호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고, 수에즈운하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약 6개월의 세계일주항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됐다. 한편 홍영식 부대사는 미국인 로우웰 중국인 우리탕과 현흥택 최경식 고영철 그리고 로우웰의개인비서 일본인 마야오키 드은 10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리오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이와같이 한국의 보빙사절들은 미국에 체재하며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고 큰 공을 세우고 귀국하게 되나 귀국하는 일행이 두 갈래로 나뉘인 데는 심각한 의견과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사려된다.

     특별히 민영익 대표와 부대표인 홍영식 사이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의 친밀했던 관계는 워싱턴 체재 중에 정치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결국 둘로 나뉘고 마는 듯하다. 민씨척족세력의 영수인 민영익이 미국 방문 중이나 귀국 후에도 사대주의를 고집하고 청국에 의존하는 친정주의와 미국의 선진정치데도를 본받아 한국의 정치개혁을 통한 근대화운동을 실현하기를 열망하는 홍영식 등의 자주노선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이 이미 미국 여행 중에 두드러젔고 이는 마침내 두 패로 갈리어 귀국하게 하였으며. 이는 1년 뒤에 일어난 갑신정변에서 입증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애석하고 슬픈 일인가?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은 제거 살해의 대상이 되었으나 중상에서 회생하였고 홍영식 서광범 변수 등은 정변의 주역이었다.

    확실히 이는 서구문명 수용의 두 가지의 대조적인 양상을 전시한다. 그 하나는 1884년 6월 2일 귀국복명을 하던 민영익의 입장이다. 그는 고종에게 미국은 땅이 넓고 곡식이 많으며 상업이 왕성하여 그에 비길 나라가 없으며, 뉴욕 또한 세계 어느 나라 도시도 이에 견줄만한 곳은 없다고 보고했다. 푸트 공사에게는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한 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되도라 왔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민공사와 동행한 포크가 귀국의 긴 항행길에서 민공사가 미국 문물시찰의 성과를 정리하기보다 유교경전만을 탐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니, 이를 어찌 보아야 하겠는가? 이는 민공이 서구의 발전된 진보의 길 대신 중국의 노선으로 기울며, 개화당에서 미는 슈펠트 대신 청국이 추천한  상해 주재 미국총영사 출신의 데니를 외교고문으로 받아 친청국정책을 체택하겠다는 것이다.  사절의 대표로 미국방문에서 돈독하게 쌓은 한미관계를 일축하고 또다시 청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구일변도의 한국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민영익은 귀국 후  자신의 보수적인 문중으로 되돌아가 정치권력을 가진 수구세력의 정치권 속에서 안주하겠다는 자세다.

    또 하나는 홍영식 등이 보인 미국의 선진 문명을 보고 체험하며 이러한 진보적인 정치를 한국에서도 실행하여 위난의 조국을 구출해 보겠다는 개화적인 입장이다. 사실 홍영식 서광범 변수 등은 서구문명에 압도 당하고 눈부시게 발달한 미국의 문물 제도에 당혹할 정도였다. 이에 귀국 즉시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하는 개화당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의 정치적인 대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진보적인 국가를 이룩하려 과감하게 나선 것이었다. 이들은 고종에게 귀국보고를 하면서 특히 미국의 교육사업, 군사제도에 대해 강변하고, 정치제도의 삼권분립과 대통령 선거, 군주제도와  민주제도의 차이, 백악관의 시설과 삼공업에서 민간기업이 차지하는 비중, 기게 공업의 설비. 연반 정치와 관료제도, 대소농의 농업경영과 농기계의 실대, 농산물과 천연자원, 선박의 운행 등에 대해 폭 넓은 관찰을 설명했다.  친청의 존화가 아니라 반청의 ‘배화존양(排華尊洋)이 한국의 발전과 자주 독립의 첩경이 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서구문명 수용의 이 두 자세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두 입장의 차이가 비극적인 한말의 생사 흥망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향과 직결되기에 심각한 것이다. 거기에 청과 결탁한 수구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민영익은 바로 실권을 가진 그의 친인척 문중으로 합류하며 자신의 권력에 안주하며, 진보적이며 한국의 정치를 개혁해보려는 개화자들은 축출되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할 수 밖게 없게 되기에, 나라는 또다시 진보 발전이 아니라 보수화로 퇴보하고 결국 망국의 길러 들어서고 만 것이다.   
   
   한국인들의 보수성과 무지, 아집이나 고루한 타성, 그날만이 아니라 아직도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탈을 벗지못하고 옹졸하게 움켜준 꼴이 한숨스럽다. 우리 일상의 생활 습성이나 생각, 심지어 신앙이나 낡은 이데올로기에 살오잡혀 조금만 나와 다르거나 진취적이면 공산주의 빨갱이라 몰아세운다.  애국운동이나 신앙운동을 펼친다면서도  문자적인 성서이해나 보수적인 믿음 또는 대국들도 반세기 전에 버린 낡아빠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동족들을 증오하는 언동이 대단한 애국애족운동이나 되는  것으로 자부하기에, 이는 100여 년 전의 우리 조상들의 무지 편협과 보수 일변도의 후진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꼴이기에 안타깝기 그지 없다. 진보적이며 문명한 나라에 사는 재미한인들도 하루속히 이런 아집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더 선진적인 생각을 가진 백성으로 성장하고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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