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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사회
LA교회서 목회중심 민족운동 전개한 신흥우
기사입력: 2009/05/12 [10:26]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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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교회의 신흥우와 하와이 교회 민찬호의 목회를 중심한 민족운동

   
      1898년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하다 지병으로 일찍 사망한 셔만 (Dr. Harry Sherman)의 아내 프로렌스 셔만 (Florence Sherman)이 “한국에서 총명한 기독청년으로 한국의 희망’이라 일컬을 만한 출중한 인물을 눈여겨 보고, 그녀가 LA  최초감리교회의 전신인  ‘한국선교회’(Korea Mission)에서 활동하며 그를 미 대륙으로 초청한 젊은이가 바로 1903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유학하여 온 신흥우다. 그는 17세던 1899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1년 독일어학교 재학시 학생회장으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다가 투옥되고, 옥중에서 이승만, 성낙준, 양의종 등과 옥중학교를 개설하여 옥중의 재소자들에게 토요일 오후 기독교신앙과 개화사상을 가르치며 토론회를 진행했다. 그러던 1902년 어느 날 그는 만연하던 콜레라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면서 그리스도께 온전히 귀의하며 세례를 받았다. 이런  신흥우를  셔만 선교회의 청년클럽 (‘We Boys Club’)이 그의 미국유학 여비와 학비 등의 재정보증을 하고 초대했기에 그는  아주 예외적으로 남가주대학( U of Southern California) 에서 공부에 전념 할 수 있었다.

   뿐아니라 그는 LA에 도착한 얼마 뒤부터 셔만 여사를 도와 한국션교회에서 활동하며 ‘선교회의 담임 전도자’로서 설교하며 그의 깊은 관심인 애국애족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의 그의 목회와 민족운동에 대해  “LA 감리교회의 100년사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는 “그의 사역은 교회의 전도와 선교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의 사역이었다. 그의 애국심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의 자주와 전이민한인의 복지와 권익 선도에 있었다”고 전한다. (동서  p.34) 활실히 당시 많은 한국의 애국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신흥우도  기독교 신앙은 서구 문명의 근간이요 새로운 질서의 윤리로서 한국의 역사적 과제를 이룩할 수 있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개인의 영혼구원과 민족을 침략의 일본에서 구원하는 일이 결코 나뉘지 안했다. 따라서 신흥우와 같은 개종한 기독자들의 기도는 “내 영혼과 조국을 구원해 주소서”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은 그 무대가 교회였지만 활동의 내용은 기독교 선교보다는 위난의 조국을 구하는 정치적이요 외교적인 것이요 동족을 계몽하여 신.불신앙을 떠나 동포사회 전체가 민족과 나라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신흥후의 LA교회의 전신인 LA 선교회의 목회와 애국애족의 운동이 그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1904년  신흥우가 ‘제국신문’ (1904/ 11/10일자)에 기고한 글에 그의 이런 정신이 분명하게 엿보인다. 그는 일제하의 한국 현실을 슬퍼할 뿐아니라 일제가 한국내외의 모든 권리와 재산을 다 뺴앗아 간 것을 통분히 여긴다. 상항한국인사의 증언에 따르면1903년 남가주대학 재학시절 일본의 한일합방의 계획을 듣고 신흥우는 한국에 돌아가 일제의 압잡이들을 죽이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헸다. 그러나 이를 안 남가주대학  총장 보바드  (Dr.C.F. Bovard)의 만류로 과격한 계획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동 상기서 P.40)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정명훈의 재판의 통역관이 필요하여 구할 때, 먼저 부탁을 받은 이승만은 살인 죄를 지은 그들을 통역할 수 없다 거절했으나 신흥우는 기쁜 마음으로 통역관으로 맡아주겠다고 자원했었다. 1911년 YMCA 총무로 한국에 귀국하기까지 신흥우는 LA 선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1921년에 다시 모교인 남가주대학원에 돌아와 공부하며 ‘한국의 재생’ (The Rebirth of Korea)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마쳤다.  1919년 3.1운동을 주제로 한 이를  단행본으로 출판하여 그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게도 했다. 또한 동년 3.1독립운동을 기념하여 관심있는 미국인들을 초대하여 한인들과 함께 필라댈파아 한인자유대회를  주도적으로 참여 활동했고 그는 국내외에서 반일 독입운동을 계속했다.

     민찬호는 이민 초기인 1905년에  유학생으로 도미하여 곧바로 호놀루루 한인감리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봉사하며 동포사회와 항일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1878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 재학하면서, 서재필의 지도로 학당 내의 협동회를 조직할 때에 신흥우, 양흥목, 이승만. 노병선, 윤창렬 등과 발기인으로 활약하는 등 민족의 선각자들의 일원이었고, 배재학당의 수학 시에 이승만과의 인연은 미국에서도 계속되어 평생을 그와 함께 했다. 1901년 길렡 선교사 (P. L. Gillete) 가  YMCA를 시작할 때엔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1905년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한 그는 응급한 교회 담임자의 요청을 따라 동년 미주 최초의 하와이 감리교회의 제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1911년 LA로 유학을 위해 떠나기까지 6년간 담임자로서 교회와 교육, 동포사회와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호놀루루 한인감리교회의 담임 교역자로 봉직하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초기 이민사회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계몽과 봉사, 진취적인 활동을 펄쳤다. 그는 ‘한인기술학교’의 교사와 ‘하와이 한인기독교회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동포들의 교육에 헌신하고 회보를 제작하여 각처의 교회와 지역에 배부했다. 1905년 8월 부임 한달 뒤에 동포들의 친목과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한인상조회’를 조직하고,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1906년에는 항일의 민족 지도자 양성을 위해 ‘공진회’를 조직하고 본토의 지도자들과 협력하며 거동포적인 민족적 활동을 계속했다.   

   1908년 11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와 대륙의 미주 한인공립협회 대표들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하나의 한인단체인 ‘국민회’를 창설할 때에 미주의 대표 최정익 이대위 등과 하와이를 대표하는 민찬호는 고석주 등과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단체가 1909년 2월1일 ‘국민회’로 통합하며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 공동한 대표를 선출하여 추진한 자세는 왕정하에 살던 한인들로선, 짧은 기간에 그 생각들이 민주적으로 발전한 놀라운 것이었다. 민찬호를 포함한 양편의 대표들은 모두 자신의 단체만을 고집하는 속좁은 탈을 벗고 오직 “애국애족의 순결한 정신과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양보 협동하는 자세로 임했으니 후대에도 본받을 한인들의 귀한 유산이었다.   

   민찬호는 계속 자신의 신학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1911년 3월에는 LA 신학교에 입학하고 정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갖 시작한  LA 장로교회의 전도사로도 선임되었기에 LA 감리교회와 병합하여 LA 연합감리교회의 신흥우 이후의 제2대 교역자가 되었다. 이들 두 교역자가 교회와 동포사회나 반일구국운동에 헌신하며 활동한 목표 등은 같했으나  정규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로선 민창호가 처음이다. ‘ LA 연합감리교회의 100년 역사,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에서는 두 교역자의 목회와 동포사회의 활동과 반일구국운동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비하며 정리했다: “신흥우가 평신도로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전 한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한 만국의 평화를 가르친 반면, 민찬호는 교회 내에서 교역자의 안수를 받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사역하면서 당시의 한민족 지도자들에에 가장 중요한 애국 계몽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역하며 이민자들을 위한 사회봉사에도 힘썼다. 이런 애국 계몽 독립운동의 시각에서 보면 신흥우와 민찬호의 사역은 크게 다른 바 없었으나, 교회의 사역의 시각에서 보면 신흥우의 사역은 주로 교회 밖에서 교육과 사회개혁에 치중한 반면, 민찬호의 사역은 교회에 적을 두고 교육과 사회개혁을 병행한 소위 종합적 총괄적  (holistic) 목회였다.” (동일서 pp.84-85)고 대비하며 평했다.

   민찬호가 남가주대 ( USC) 를 졸업하던 1918년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에 승리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세계평화를 위한 선언을 하던 때였다. 그의 선언문 중에는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 UN의 전신)을 조직하고 모든 식민지 국가의 독립과 자주를 보장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에 다른 약소국가들과 같이 한국도 일제에서 해방되는 기대를 가지며 파리강화회의를 기다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인 국민회 전국대회는 한성정부의 국민회  대표들 중에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3인을 파리대회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나라가 없는 한국대표들의 여권발급을 거절한 미행정부의 비협조로 끝내 파리평화회의 참석은 불발되고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윌슨의 약소국의 독립이나 자유란 유럽의 약소국들 뿐이요 한국같은 동양의 신음하는 약소국가는 의중에 없었다. 국내외 모든 한인들은 격분했고 1909년 10월 만주에선 안중군이 이등박문을 살해하는 등 격렬한 항일운동으로 돌입하며 이런 운동은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젔다. 파리회의가 진행되던 1918년 12월 코럼버스 오하이오 주립대  ( Columbus Ohaio State U.) 학생들이 영자신문을 만들어 국민회가 추진하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일제의 만행적인 학정을 서구 세계에 알리려 했다. 이 소식이 동경의 유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이에 자극된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한국과 미국의 독립투사들에게 통보하고 이는 국내 애국지사들을 자극하여 마침내 3.1운동에까지 이르게 됐다.

 (Hyung-ju Ahan, “A Cetennial History of Los Angeles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A Draft” Sep. 27,2002. pp. 42-43)

   민찬호는 정치적인 야망보다는 교회를 기초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복음의 사역과 동포들의 애국애족심을 권장하며 이승만과 함께 가능한 재미한인들의 힘을 모아 항일구국운동에 폭 넓게 활약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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