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서광범은 뉴욕으로 떠난 뒤, 서재필은 혼자서 상항에 남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는 서재필이 일본 동경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군의 대령이었으며 그는 한국군의 부사령관을 역임했 었다고 소개했다. 실상 병조참관 즉 지금의 국방차관을 역임한 편이었기에 크게 잘못된 소개는 아니었다. 그러나 홀로 이국 땅에 떨어져 숙식마저 어렵게 된 그였지만 미국에서의 생존비법을 곧 터득한 그는 굴하지 아니하고 낮에는 노동을 하며 밤에는 YMCA에 나가 무료 영어를 배우며 열심으로 살았다.
주머니에는 일제의 영어사전을 가지고 매일 새로운 몇 단어들을 외우며, 교회에서 일자리를 얻어 일하면서 영어발음 교정도 받았다. 그는 매주 성경공부와 주일예배에 열심으로 참석할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교회에도 나가 몇차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영어를 배우려는 뜻도 있었으나 미국에서 믿기 시작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확신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생에 대한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하며 따르는 헌신의 크리스천이 된것이다.
임창영의 영문저서 “첫 한국계 미국인-잊혀진 한 영웅, 서재필”Channing Liem, The First Korean-American: A Forgotten Hero, Philip Jaisohn”은 그가 귀의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잘 보여준다(pp 103-106). 그는 미국 교인들과의 친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나가던 메이슨 스트맅 장로교회의 로버츠 장로 James Roberts는 젊은 서재필의 성실한 생활과 교회활동 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따금 주일 저녁에 그를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고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기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더 나은 생의 방도를 찾아 상항 거리를 누비던 서재필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에 “노” 하면 대부분의 직장 에서도 “노”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간 가구점 주인 역시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여러번 실패의 경험을 한 서재필은 이번엔 색다른 대답을 했다. 손을 들어 팔의 근육을 보이며 서툰 영어로 “영어는 잘 못하지만 나는 힘이 셉니다”고 말해 가구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일은 가구점 선전문을 상항 거리 10스퀘어 마일을 걸어다니며 붙이며 일당 2달러를 받는 것이었다.“일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나 일본제의 잘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것이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갈라지고 해어진 발바닥이 밤에는 얼얼하고 쑤셔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으며 다음 날에도 다시 그 괴로운 광고지를 붙이는 마라톤을 했다. 얼마 지난뒤 그 가구점 주인은 자기가 고용한 세 사람 중 내가 제일이라고 했다.” 서재필의 동아 회고록의 한 대목이다.
서재필이 아직 힘든 노동을 하며 어렵게 지내던 어느 일요일 밤 로버츠 장로의 초대를 받은 식사의 자리에 마침내 홀렌백 John Wells Hollenback이라는 펜실바니아 석탄광 부호를 소개받아 만나게 된다. 그는 서재필에게 미국에 온 목적을 물었다. 서재필은 미국 교육을 받으러 왔으나 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YMCA 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다. 홀랜백은 그에게 관심하며 자기가 있는 곳에 오면 여비와 학비도 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서재필은 감사히 받겠다며 그의 뜻을 따라 펜실바니아로 가게된다. 그리고 이후 서재필의 숙식과 중고등 대학의 모든 학비를 후원해 주었기에 서재필이 그를 “구호의 천사”라 부를 만큼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실로 홀랜백은 탄광의 부자일뿐만 아니라 그곳의 은행 총재를 역임하였고, 그후 100에이커의 땅을 시에 기증하여 홀랜백 공원을 만드는 등 그 지역의 유지였다. 또한 그는 장로교의 장로로서 교회학교를 운영하며 서재필이 다니던 힐맨 아카데미 Hillman Academy와 라파에트 대학 Lafayette College의 이사직도 맡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서재필은 귀한 미국인들을 만나게 되며 그가 미국에서 정착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미국 땅에 버려진 젊은 망명객인 그에게 이런 후견인들 만나게 된 것은 그를 부르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같기만 하다. 옛날 동족을 괴롭히는 애급인을 죽이고 멀리 도피하여 한을 안고 광야에서 목동 노릇을 하던 모세를 불러 노예같이 고통 받는 히브리인들을 구하려던 하나님의 섭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재필이 이후 조국의 개화, 미국에서의 한국의 독립운동과 재미한인사회를 위한 각가지의 활동들을 종합해 볼 때 이런 비교는 어긋나지 않은 것같다.
상항에서의 일년여의 어렵던 생활을 정리하고 1986년 9월경 서재필은 그의 고백과 같이 “천재일우의 행운에 몹시 기뻐하며” 홀랜백의 고향인 펜주의 윌키스배리 Wilkes-Barre로 옮겨와 그가 경영하는 힐맨 아카데미 에서 중학공부를 시작했다. 애팔라치아 Appalachia 산맥의 동북끝에 써스크하나 Susquehana강을 낀 아름다운 도시에 자리잡은 힐맨은 이곳 유지 자녀를 교육하기 위한 작은 학교였다. 서제필이 여기에서 3년간 영어를 위시한 불어 독일어 라틴 희랍어와 수학 생리 과학과 미국사 세계사 등을 배우는 학업에 전념하고, 미국 상류층의 청소년들과 어울려 놀면서, 오직 구국의 꿈과 지혜를 구하며 인격수련에 정진하였다. 이는 마치 갈대상자에 놓여 나일강에 버려진 어린 모세가 애급공주에게 구원되어 왕자의 대우와 궁정교육을 받던 모세의 축복과도 같다. 더욱이 서재필이 힐맨의 교장 저택에 기숙하며 미국의 주법원과 연방정부의 법관을 역임하고 은퇴한 교장의 장인과 한 집에 거하게 된 것은 더 큰 특혜였다.
그는 밤마다 미국인들의 생활 문화 교육 정치 법원의 제도 등 서재필이 미국과 서구문명에 관해 알고 싶은 것들을 소상하게 소개하며 가르쳐 주었다. “그는 밤마다 입법과 법정에서의 자기 경험을 말해 주었는데, 미국 생활과 제도를 알기에 목마른 나에게는 유일하고도 견줄 데 없이 흥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정규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나에게는 그만한 연령, 그만한 경험의 인물과 그다지도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참으로 희귀한 기회이었던 것이다.” (체미 50년) 5년의 과정을 3년만에 졸업하면서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연설’까지 했던 것은 그가 얼마나 최선으로 살았던 가를 증표해준다.
힐맨을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려는 즈음, 홀랜백은 서재필에게 라파에트 대학과 프린스톤 신학을 공부 하고 한국의 선교사가 되는 부탁을 후원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대역죄인으로 몰려 지명수배의 몸이요 7년 뒤 그 자신이 선교사의 자질이 될지도 모르는 서재필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큰 도움을 준 은인을 작별하고 서재필은 1888년 여름 구직과 대학교육을 위해 또한 기우는 조국 구원의 길을 생각하며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 사이 워싱턴에는 당년 1월 주미공사관을 개설하고 박정양 주미공사를 비롯하여 이완용, 이상재 등 10여명의 공사관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적의 몸인 서재필이 가까이 하기엔 피차 수월치 않은 관계였다.
워싱턴에 도착 한 서재필은 수 개월 동안 고초을 겪다가 육군 의학 도서관의 직원으로 취직하고 죠지 워싱턴 대학의 전신인 컬럼비안 대학 Columbian U. 의 야간부인 코코란 과학원 Corcoran School 에 입학하여 8년간의 대학과 의학과정을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1890년엔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미국시민권을 획득하였고 이어 만28세가 되던 1892년 3월에는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또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의 의학사 M.D.의 학위를 얻고 이어 워싱턴 시내 가필드 Garfield 병원의 인턴을 마친 다음 해인 1893년엔 미국 의사면허를 획득했다. 요지음도 의사되기 쉽지 않은 미국에서 백수십년 전 그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 뜻을 이룬 서재필의 노고를 치하한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서재필이 10여년의 학업을 마치고 만 30세 되던 1894년 6월 20일 당시 이국인과는 법으로 결혼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철도 우편국 U.S. Railway Mail Service 창설자요 초대 국장이었던 암스트롱 George Armstrong명가의 영애 23세의 금발의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 양과의 재혼은 예외적인 뜻있는 경사였다. 결혼식은 워싱턴의 유명한 목사인 햄린 박사 Rev.Dr. Lewis Hamlin가 카브낸트 교회 Church of Covenant에서 국회의원, 판사, 의사, 장군, 정치인 등 200여명의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했다. 워싱턴의 유력 신문들인 Washington Post, Washington Evening Star 등은 법률상의 문제나 인종적인 편견이 없이 이들의 결혼식을 전하며 유능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제이슨 서재필과 뮤리엘의 부모 양가가 모두 명문가였던 사실에 대해 소개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결혼식으로 보도해 주었기에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결혼 다음 해인 1895년에는 모교 의대의 조수로 봉사하며 워싱턴 시내에 개업까지 하게 된다.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적인 연유로 수입은 적었으나 이제 그는 전문인 의사로서 워싱턴에서 개업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룬 미국 시민으로 활동하게 되었기에 서재필은 그의 목표 하나를 이룬 것이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어 청일전쟁 후 마관조약으로 한국이 독립국이 되고, 새 정부에는 옛 친구인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유길준 등이 각료가 되며, 서재필에게 사면과 함께 외무차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왔으나 의학연구를 구실로 거절했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박영효가 다시 워싱턴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는 한국의 황제 측근의 궐내 도당들과 반목불화의 작태가 1884년 때와 똑 같아 더 절망적이라 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재필은 귀국을 결심하며 병원문을 닫고 1896년 12월에 귀국 길에 올라 1897년 초에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귀국하자 고종은 김홍집, 유길준 등의 새 정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사가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구각료들은 피살될까 두려워 미국 공관에 은신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또한 조야를 막론하고 관료들은 여전히 모해하고 살벌하며 옛날과 다름 없는 것을 보며 서지필은 미국에 다시 건너가려고도 했다. 그러나 유길준 등이 강력하게 만류하고 미국에서 조국을 위해 결심한 뜻을 결행하기 위해 머물기로 했다. 비록 한국에 있더라도 결코 벼슬은 하지 않고 “민중 교육을 위하여 신문을 발간하며 정부가 하는 일을 서민이 알게 하고 , 다른 나라들이 한국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워 주는 일”을 해보려 했다. 급변하는 정치적 정황에서도 동료들의 신문을 위한 재정적 후원만은 계속되었다. 한글로 된 ‘독립신문’이 “대호평을 사서 사회 각층에 널리 읽혀지기에 공정을 기하려는”서재필은 “불편부당주의로 어느 편 어느 패에도 쏠리거나 기우리지 아니하고…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글로나 말로나, ‘한국 의 민리 민복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한국 위정자의 의무라는 것’을 역설하니 …일반은 점차로 정부의 행사와 그 정치적 동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민중복리 정치를 한국 땅에 펼쳐보려 한 것’이 서재필이 미국에서 배운 정신이었다. 임금과 대신 관리들이 이런 구국정신으로 하나가 되어 나라와 민족의 복리만을 위해 힘썼다면 한국이 일본에게 결코 침탈당할 수 없었으나 한말은 이런 마지막 기회마저 상실했기에 결국 일본에게 한국을 완전히 뺏겼다고 보았다.
사실 친한적이던 미국의 공사나 선교사들도 이런 생각을 가졌으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통해 이런 충언을 강력히 펼쳤으나 보수의 구관료 정치배들은 변화는 커녕 서재필을 위협하고 죽이려는 음모도 서슴치 않았다. 결국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신문을 맡기고 2년여만인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이후 사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에 다시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서재필의 그 이후의 미국에서의 생과 구국운동에 대해선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며 그의 초반의 생은 여기에서 일단 그치려 한다. 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이민 이전의 서재필이나 그 밖의 망명객과 유학생들의 활동이나 애국운동들이 미국 조야에 계속적인 관심을 끌며 이들이 이후의 인민자나 재미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실이다.
<박성모 /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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