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의 관리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고 어머니 마저 6세 때 죽었기에 ‘변갑이’라고도 불리던 김규식은 돌보아줄 사람 하나 없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설립한 고아원에서 자라던 김규식이 심한 병으로 죽게되었으나 언더우드의 특별한 병간호로 낫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후원으로 서양교육과 기독교교육까지 받았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으며 살던 김규식이 어느날 서울거리에서 우연히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김규식은 그를 따라갔으나 그가 9세되던 때에 갑자기 사망하자 부모도 없는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재질과 가능성을 본 언더우드의 특별한 주선으로 김규식은 마침내 미국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김규식이 16세 되던 1897년 버지니아의 세일렘에 있는 로노크대학에 유학하여 첫해에는 로노크대 예과에서 고등학교 수준의 수업을 받았으나 영어 라틴어 역사 수학 등의 전과목을 90점 이상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다음 1898년 가을학기에는 학부1학년에 입학하여 정규 대학 과목들을 이수했으나 이 때에도 생소한 동물학 외의 거의 모든 학과목들을 90 점 이상의 출중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의 학비나 책값 등의 장학금 외에도 1년 200여불의 비용이 더 필요하여 그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일하며 이를 충당했다. 그의 입학 당시 서규병 박희병 등 5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으나 1899년에 서길병은 졸업하여 떠났고 주미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 부친의 유럽 전근으로 그도 떠났다. 그러나 1901년 3월 24세의 의친왕 이강이 2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 시에 있는 웨슬리언대학으로 유학와 김규식은 이따금 만날 수 있었다.
로노크대 재학 시 영어에 능한 김규식은 문학회 정치토론회에 참가할 뿐만이 아니라 로노크대학 잡지에 몇 차례의 글을 발표하고 대학의 강연상을 받기도 했다. 김규식은 영어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대학 내의 여러 써클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열심히 참여했다. 특히 정치적인 써클 활동에는 더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활동은 그의 민주적인 정치철학을 수립하고 훗날의 배일독립운동의 지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문의 글을 쓸 수 있는 우수한 실력을 가진 그는 로노크 대학의 잡지 1900년 5월호에 ‘한국어’라는 글을 게재하여 한글과 한국말의 우수성을 소개했다.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서광’이라는 연설문을, 동년 4월호에는 ‘양반과 그의 조카’라는 한국의 설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가 졸업하던 1903년 5월호에선 국제정세에 관한 정치평론인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게재하며 머지 않아 한국이 일본 통치하에 들어가리라는 암시까지 했다. 또한 그는 미국 대학생들의 최고 명예라 할 졸업 연설자로 선출되어 ‘극동에서의 러시아’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으며, 그 내용이 대학 잡지에는 물론 1903년 6월14일자의 ‘뉴욕 선’지에 게재됐다. 이 글에서 김규식은 러시아의 야만성과 침략성을 고발하고 유럽을 위협한 러시아 세력이 극동으로 옮겨와 한국을 위협하고 머지 않아 일로전쟁이 발발하리라는 시사까지 했다. (조종무, 아메리카 대륙의 한인 풍운아들. (pp.124-25)
확실히 그의 6년여의 로노크대학에서의 공부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수련은 미국식 사고나 민주제도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고 정치적 안목과 국제관계 등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일제하의 어려운 생을 그가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 갈 지혜를 주었다. 훗날 그의 파란만장한 반일 애국애족적인 모든 활동과 해방 후 좌우세력을 규합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최선을 다한 것도 그가 미국 유학에서 보고 배우며 친히 경험하고 수련했던 영향같다.
김규식은 1903년 로노크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와 1년여 살며 여비 등을 위해 일을 했던 것같다. 후일 조종무가 미국에 살고있는 김규식의 딸 김우애를 면담하며 나눈 대화에 따르면 한 때 김규식이 뉴욕에서 미국 회사에 다니며 사귀던 미국 아가씨와의 일화가 있다. 우애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아버지가 미국 여인과 깊은 관계에 있어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는 미국인 부인이 적합하지 않다는 자각 때문에 이별을 하고 다음 해에 귀국했다”고 한다. (조종무, 상기서 P.125). 국내 발행의 김규식 전기나 한국역사 인명록 등에는 김규식이 “1904년 프린스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것을 발견하나 잠시 프린스톤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던 일이 있었기에 오도된 기록같다. 여하튼 김규식은 그리도 배울 것이 많고 민족운동을 위해서도 미국에서 할 일이 있는 것을 알기에 아쉬어 하면서도, 한일합방의 준비가 다 되어가며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해 있던 1904년 일단 귀국한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자주 민족과 국제적인 기독교 회의 참석 등의 일들로 구미를 왕래하며 미국에 다시 와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04년 봄에 귀국한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이라며 YMCA의 간사, 경신학교 배재 연희전문에서 강의하고, 새문안교회의 장로와 전국 주일학교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외교적 구국운동에 헌신하며 활동했다. 그 사이 일제는1905년에 을사보호조약,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을 통채로 삼켰다. 이어 국내외의 어떠한 배일의 위협이라도 배제하기 위해 일제는 흉계를 꾸미려 했다. 마침대 일제는 그 일환으로 항상 한국에서 눈의 가시같던 애국적인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소위 ‘105인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의 조작이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일제는 계속하여 김규식을 위협하거나 회유하며 일제협조를 강요하기에 1913년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의 상해와 몽고에까지도 드나들며 생계와 민족운동을 위해 고생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이러던 중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파리에서 전승국들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던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파리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일본의 방해책동이 대단하였으나 그는 끝내 한국대표부를 설치하고 대한임시정부의 명의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한민족의 주장’과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하며 일제의 침략과 한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일제의 강력한 반대운동으로 큰 구체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의 활동으로 한국문제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뿐아니라 그는 파리회의 후 다시 미국에 건너 와 1919년 8월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미국에서의 구국활동을 재개했다. 김규식은 계속하여 1920년 말에는 상해임시정부 학무총장의 직임을 맡고 당시 임정내분을 해결하려 노력하며, 1922년1월에는 모스코바의 극동노동자 국제회의에 여운형과 함께 임정대표로 참석했었다. 이런 김규식의 애국애족적인 국내외의 운동 특히 그의 파리에서의 국제적인 활동을 모교 로노크대학은 높이 인정하여 1923년 그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www. daum.net/dic 김규식)
이후에도 김규식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다. 1924년엔 이청천 등과 소련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자리를 옮겼으나 1925년 일소밀약으로 다시 상해로 추방되면서 1927년에는 천진의 북양대학에서 4년여 영문학을 강의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울 때에는 남경으로 옮겨 대한임정의 국무위원으로 복귀하고 이듬 해부터는 남경의 중앙정치학원과 사천대학에서 교수룰 계속했다. 그러나 1935년 김원봉 중심으로 결성된 중국 내 각 정치세력들을 망라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주석으로 활동하고, 1942년 김구와 김원봉이 연합전선을 펼치자 김규식은 임정에 복귀하여 부주석으로 일했다. 이토록 김규식은 미국유학 이후 40여년을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김구 이승만과 함께 세 사람의 민족대표자의 위치에서 활약했다. 특히 김규식은 남북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고뇌하던 중에 6.25 전쟁이 발생하고 납북되어 1950년 12월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심장병과 천식으로 운명했다는 전갈이다.
그의 숭고한 민족정신 특히 좌우익의 이념대립을 넘어 어느 한편에 기울거나 적대시 하지 않고 강대국들에 의한 좌지우지도 아니며 우리 민족의 통일자주국가의 꿈을 이루려 했던 꿈, 그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서거하기에 슬픔을 금치 못한다. 더욱이 그 후 수십년을 남북해외 7천만이 열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분단의 아픔을 겪거야 했던 민족적 과제에 직면하며, 김규식의 한민족을 위한 선각자적인 사상과 노력을 새삼 떠올린다. 1923년 9월 코민테른에 제출한 한 비망록에서 김규식이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두 요소가 한국민중의 해방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던 주장은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민족통일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 이념을 뛰어넘어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규식의 또 하나의 귀한 통찰은 통일전선을 위해 국제정세의 변화를 바로 파악하여 이를 민족통일운동의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미 군정과 대립하던 김구와는 달리 김규식은 남한 주둔의 미 군정을 인정하고 미 군정의 정책에 동참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해방 당시 김구 이승만과 우익의 3영수 지도자의 하나로 꼽힌 김규식이 여운형과 함께 중간파의 지도자 역할을 한 그를 미국은 왜 한 때나마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을까? 1947년에 미군정은 이승만대신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고, 소련군정도 통일한국의 총리로 김규식의 임명을 고려하기도 했다. ( KBS-Able, 광복 60년 기념 3부작,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제3편 김규식 편, 1/21/2005 방영 자료) 이러한 미소의 생각도 잠시 뿐이었으며 미소는 점차 한반도의 분단과 두 정부의 수립으로 기울어졌었다.
한평생, 오직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려 하며 남북 분단의 두 국가가 세워지려던 1948년 김구와 합께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까지 하면서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끝내 꿈으로 끝나고 한반도는 분단된 채 벌써 반세기도 훨씬 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젊은 사가 이준식의 “국망과 분단을 초래한 외세에 맞서 민족역량을 한 데 모아 민족해방과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이루려고 한 김규식의 인식과 활동은 분단의 극복이 모색되는 현시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는 통찰은 옳게 본 판단이었디. (김준식, 연세대 국학연구 교수. 해방중굴의 중도파들 (3)우사 김규식). 아직도 이해관계에 얽힌 4개국을 포함한 6자회담에 남북 화해와 통일평화를 기대하면서도, 김규식의 선각자적인 지론을 잊을 수 없다. 지나친 좌우익을 배제하며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만을 최우선으로 주장했던 김규식이다. 무력이나 전쟁으로 라도 통일을 이루며 남북의 공멸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서로 안고 다같이 사는 민족 공존 공영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떠났으나 우리는 이러한 선각자의 꿈을 한시도 잊을 수 없다.
< 박성모/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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