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역관과 의관의 중인 가문 변진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변수는 부친의 친구 시인이며 개화사상가인 강위에게 수학하며 김옥균과 교분을 맺는다. 한국은 1876년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 미국과의 수교를 앞두고 일본의 국정을 살피며 차관도 얻으려 1881년 12월 김옥균을 파견하며 서광범 강위와 함께 변수도 대표단에 참여했다.
변수는 일본의 발전에 놀라며 특히 농업문제에 관심이 많아 실업학교에 입학 양잠술과 화학 등의 공부에 몰두했다. 마침내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의 여러 공장 시설을 시찰하며 뉴저지 뉴왁에 있는 죤커터쓰 John D. Cutters 견직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에, 뉴욕타임스 11/16/1883일자)는 이를 기사화 했다: “변수는 일찍이 일본에서 비단처리공장에서 견습을 쌓았으며 특히 이번 면직공장 시찰에 아주 만족하면서 관련된 여러 질문을 했다.” 이 밖에도 보빙사 일행이 미국 여러 곳을 방문할 때에도 변수는 특히 뉴욕의 헤럴드 신문사, 하바드 마이어 제당공장, 웨스턴 유니온 전신회사, 에디슨 전기회사, 보스톤의 웨코트재령의 시범농장, 로웰 프레트 방직공장, 아이어 제약회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며 메모하기에 바빴었다.
귀국 직후 그는 국왕을 자주 알현하는 직임을 맡아 왕의 총애를 받으며 국왕이 개화사상을 통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준비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가담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김옥균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민영익이 대원군의 환국저지를 위해 천진에 가 이홍장을 설들했으나 실피한 후, 상해와 홍공을 왕래하며홍삼수출권을 독점 막대한 이익금을 얻어 홍공의 프랑스 은행에 예금했었다.
그러나 이 예금이 당시 상해 유학생 민주호와 윤정식 두 사람이 예금을 흠쳐 달아나게 된다. 상해에 먼저 와 유학하던 윤치호가14세의 민주호와 윤정식을 1885냔 10월 상해 중서학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으나, 이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민영익을 따라 홍콩으로 가 그의 집에 살았으니 이런 연고를 이용하여 1만 6천원 (양화 $17,288달러)의 거액을 흠쳐 일본 요코하마로 도주, 망명생활을 하고있는 김옥균을 찾아 돈 처리와 앞날의 일을 의논한다. 김옥규은 자신도 수배의 몸으로 변수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없고 변수 또한 이미 미국에 다녀 온뒤 다시 미국에 갈 기회를 찾고 있는 처지였다. 따마침 민주호와 윤정식도 도주의 길을 찾기에 변수와 함께 가도록 김옥균은 주선했다.
그들은 4천 달러를 김옥균에게 내어놓고 1886년 1월 24일 변수와 함께 조국의 도적의 몸으로 수배된채 미국으로 도주 망명하여 간 것이다. 한국의 김윤식 독판은 포크공사에게 이들의 나교 송환을 요구했으나 불가의 통보를 받았다.
이들은 콜리어Lucian Collier 여사의 주선으로 워싱터의 벌리츠 어학원 Berlitz School pf Language 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중, 조정은 프에이자 Everett Frazar 뉴욕주재 한국명예총연사에게 다시 콜리어를 통해 변.민.윤 삼인을 귀국토록 간청했으나 콜리어 여사는 “이들이 죄인이나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면 조미 양궁의 교섭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 답변하며 다른 요청은 거절하기에 조정의 이들 체포는 포기하게 된다.
1887년 9월 변수와 민주호는 현 메릴랜드대의 전신인 작은 메릴랜드농과대학에 입학하여 46명의 학생 중 단 2면의 한국학생으로 공부한다. 학우 중에는 남북전쟁의 영웅 암멘 Daniel Ammon제독의 아들 그랜트 암멘 Ulysses Grant Ammon 과 메릴랜드 귀족 칼머트의 아들 칼버트 Calvert 도 있었다. 특히 암몬 제독은 곤고한 처지의 두 망명학생들을 친절히 보살피며 학비보조까지 후원해 주었다.
그러나 1666년 1월 막 문을 연 워싱턴의 북미한국전권공사관의 박정양 공사는 돈을 훔칱 주범은 운정식이고 민주호는 14세의 소년이기에 무죄를 선언하며 귀국을 종용한다. 이에 민주호는 학교를 중퇴하고1888년 귀국하여 빚을 갚은 후 이름도 민상호로 고치고 한일합방 후에는 남작칭호까지 받은 것을 보면 친일적인 여생을 살다 1936년에 사망했다.
윤정식은 돈 갚을 형편도 되지 못해 거취를 감추었다가 귀국하여 투옥되었다는 소문이나 그 뒤는 불확실 하다. 다만 변수만이 농업 근대화가 농민의 만성적 절대빈곤을 물리치고 한국을 살게 할 수 있다는 화신에서 갖응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농업공부룰 계속했다. 한국의 죄인으로 쫓기던 변수는 대학 3년째인 1890년 1월에는 미국시민권을 신청하였고, 1891년 6월에는 이학사의 학위를 받음으로 한국인의 최초 미국대학 졸업생이 된다. 그는 졸업 직전 농무부의 위리츠 Wiiltts 차관보를 만나 농무부에서의 일자리를 구하던 중, 일본 중국 한국의 농업통계자료 정리가 필요함을 알게 되고 우선 3개월간 농무부의 촉탁으로 근무를 했다. 일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변수는 먼저 ‘일본의 농업’에 관한 보고를 완성하여 ‘농무부 통계월보’ 제89호 , 10월호( The Montjly Report of the Statistic Bureau, U.S.Agriculture Dept. No.89, October 1891, “Agriculture in Japan”) 에 게재했다. 이에 윌리츠 차관보는 그의 “어학 능력과 농업지식으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대학졸업 4개월, 농무부에 근무한 3개워만인 1891년 10월 22일 통근열차를 기다리던 중에 그곳에 서지 않는 급행열차를 마땅히 정지하는 완행열차로 오해하고 선로에서 손을 흔들다가 늦게 발견한 기차가 브레익을 할 겨를도 없이 그를 떠미는 사고로 운명하니 그의 나이 겨우 30이었다.
낙후 한 한국의 근대화를 통해 조국을 구해보겠다며 만난을 무릅쓰고 수고한 그의 모든 한과 꿈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실로 애석하고 기구한 운명이었다. 사망소식을 한국공사에 통보했으나 변수에 대해선 아는 바 없다는 것이 공식답변이요 수배의 망명죄인이라는 구실로 아무런 관심도 도움도 없었다.
그러나 변수의 사망 소식을 접한 ‘워싱턴 포스트’지 (1891/10/24일자)는 그의 사망과 함께 슬퍼할 아무런 직계 가족 하나도 없는 한 많은 젊은 망명객의 생을 동정적으로 보도했다: “…열차에 치어 사망한 한국 청년 변수는 왕가의 외척으로서1880년대 초 보빙사절단의 일원이던 그는 농업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메릴랜드농대를 지난 6월 졸업했다…보빙사절 귀국 직후 집권당인 수구사대당과 대치하곤 개화당에 가입,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평소의 관심이던 농학을 메릴랜드농대에서 공부하고 농무부장관으로부터 주로 중국 일본 양국의 농업통계자료에 관한 정보를 입수 보고 하도록 한 바 그는 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후 일주일 수습기간이 끝난 휴 논뮤뷰관리 촉탁에 재입명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중국의 농업 상태’에 관한 보고서를 준미하고 있었다. 성격이 세심하고 외국어에 능한 그가 사망시에 겨우 30세의청년이었다.오늘 오후 4시20분에 암멘데일에 있는 암멘 제도의 저택에서 장례식이 있으며 유해는 성 요셉 공동묘지에 안치된다. 그의 동창 친구 암멘, 칼머트, 부르크스, 맨닝 ( Grant Ammen, Richard Calvert, Brooks, Russel Manning) 등이 관을 메고 간다.”
변수의 장례식은 1891년 10월 24일 암멘 저택에서 거행되었으며, 장례식에는 암멘 제돌과 그의 가족들, 메리랜드농대 총장 알보드 Alvord, 변수의 대학 동창생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수배의 몸이나마 아직 극소수의 한인이 미국에 있던 1891년 당시 이채영 공사와 공관원들이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특히 그랜트 대통령과도 교분이 있던 암멘 제독이 아들의 친구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그의 유해를 캐토릭 묘지에 안장하도록 주선하고 비석까지 세위 기리니 재미 후손된 우리로사 고맙기 그지 없다. 워싱턴 동북 쪽 메릴랜드주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의 성요셉묘지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벤수’라는 한국말 밑에 (이는 미국 친구들이 평시에 기억한 변수의 한글 이름 표기 같음) 영문으로 ‘변수를 기념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 나라에 파견된 회초의 아적에 속하엮던 한국인더로 1891년 10월 22 칼리지 정거장에서 청도 사고로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암엠 제독은 국무블레인 국무장광에게 변수의 유품을 보내며 가족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이는 다시 주한공사 허드 Augustine Heard에게 도달하며 조정은 변수의 연고자를 찾으나 대역의 수배자로 몰린 가족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숨어 어렵게 살던 변수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뮈텔 주교( Gustave Marie Mutel) 를 찾아와 아들의 사물을 인수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런 우여골절 끝에 가련한 변수의 유품이 마침내 어머니의 품속에 돌아오게 된다. 유품이래여 값진 대단한 것들은 없었으나 호구지책도 어료운 어머니에겐 그 몇가지라도 팔아 연명에 도움이 되었다 하니 당시 한국인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엿보게 한다. 장례 비용은 변수의 친구들이 부담하고 학비로 빌린 돈은 국무부에서 보낸 돈으로 청상했다고 한다.
유품 속엔 줄달린 금시계, 장식용 연필쏮이, 금반지, 작은 주머니 칼이 하나 씩 들어 있었다. 칼과 연필만 남기고 얼마나마 값되는 것들은 팔아 생계유지에 보탰다기에 더 애처럽다. 그후 1910년 7월 18일 친일의 이완용내각은 면수를 사면하고 종2품 규장각부제학을 측증하는 은사를 내려 ‘역사의 죄인’의 누명을 사후에라도 면하게 됐다 (고순종실록, 하.p 551). 미국에서 대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아는 재미한인들로서 더욱이 한국인으로 첫번째의 이학사의 대학졸업생인 변수가 불의의 사고로 직계 가족 하나도 이 땅에 없이 외롭게 유명을 달리한 사실은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기구한 죄인망명의 누명을 쓰면서도 주저안지 않고 농업한국의 장래를 생각하며 농업을 전공하며 나라에 공헌하겠다며 조국의 사면 부름을 하루하루를 기가리며 살다다가 죄인의 누명도 농업국가의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꿈도 표보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떠나게 되기에 연민의 정이 한층 더 한다. 뒤 늦은 사면이나마 저승에서 편히 쉬기 기원하며, 후손 된 우리는 인생의 무심함을 되새기며 이국 땅에서의 나날을 더 귀하게 살며 미국과 한반도에 보랍되게 사는 자들이 되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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