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손누트 공항의 눅눅한 열기
남한산성 인근 미군부대 앞에 <형제 목공소>를 차려놓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지내려니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사는 느낌이 들었다. 63년 제대 이후 마음이 들뜬 상태에서 의정부에다 목공소를 차려놓고 몇 개월 일을 하다가 운천으로 옮겨 양키 물건 운반책으로 신나게 번 돈을 하루아침에 날린 일들이 어느 새 까마득한 옛날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만 같았다.
<형제목공소>는 의정부 때와는 달리 장사가 잘 됐다. 솜씨가 그럴듯했던지 소문이 꼬리를 물어 많은 일감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미군부대 장교숙소에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일감을 주문 받았고 또 때로는 그 안에서 일을 할 때도 있었다. 형제 목공소 손님 중에는 그 부대 대대장도 있었는데, 나는 자유롭게 부대를 출입하려면 그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마음 먹고 그가 이것저것 만들어 달라고 일을 맡기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친해졌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그 일만 해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힘들지 않느냐”며 혹시 월남에 가서 일해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목수라는 직업은 항상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기술 중에서도 배고픈 기술이었다. 오죽하면 미군 대대장이 보기에도, ‘저래가지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 미군 대대장은 내가 먹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해서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월남이란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심코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지만 6.25를 체험한 나는 전쟁터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참한 비극들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평상시엔 기대할 수 없는 기회도 많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대대장의 허리춤을 움켜잡는 심정으로 그가 던진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미군 사물함이나 짜면서 일생을 마칠 수는 없었다. 월남이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왠지 좋은 기회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해외에서 일할 기회는 정말 드믈었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선택된 사람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선뜻 해외취업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까짓 것,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내가 적극적으로 달라붙자 중령은 마지 못한 듯 방법을 알려주었다. 부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김국배라는 사람의 케이비 킴사(K.B. Kim & Co.)가 월남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거기 가서 일할 생각이 있다면 소개를 해줄 테니 잘 생각해보고 원서를 내라는 것이었다. 그가 ‘잘 생각해 보라’고 단서를 붙인 이유는 당시 월남에 있던 RMK라는 회사에 폭발사건이 일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중령은 아무래도 말을 너무 쉽게 꺼냈다는 생각이 드는지 조건을 꺼냈다. “원서를 내기 전에 먼저 당신 부인에게 승낙을 받아 오시오.” 사고가 발생한 RMK에서 한국인 파월 기술자가 많이 희생당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민간인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은 전쟁터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동의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부모님 허락도 아니고 아내의 승낙을 받아오라는 게 우스웠지만 혹시나 싶어 나는 아내에게 사전에 다짐을 받아두었다.
“혹시 미군 대대장이 와서 뭔가 물으면 무조건 ‘오케이, 오케이’ 하라구.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영어를 못해서 대화를 나눌 때 손짓 발짓 다해야 겨우 뜻을 알아듣는 판국에 아내가 영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대대장이 찾아가서 물어봐야 의사소통이 될 리 없었다.
좌우지간 나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케이비 킴은 지원자들 중에서 1차 서류 심사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태원 중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실기 시험을 실시했는데 목수만도 40여명이 몰려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대학 나온 실업자들이 즐비할 때였다. 대학을 졸업해봤자 한국전력, 충주 비료 아니면 산업은행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문이 좁았다. 케이비 킴 응모에 5, 6대 1의 경쟁율을 보인 것은 당연헀다. 나는 미군 부대 대대장이 “미스터 캉은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니 잘 좀 봐 주라”고 김 사장에게 부탁을 해선지 제일 먼저 뽑혔다. 그래서 잔뜩 꿈에 부풀어 월남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극장영화를 시작하기 전 돌려주는 <대한 늬우스>에서 짠,짠,짠, 짜안-, 정글 속을 누비는 파월 장병들의 전투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군인의 신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전쟁터로 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부산에서 군인들을 가득 싣고 수송선이 떠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았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그땐 배 위에서 부두에 서 있는 가족이나 애인이나 친구들에게 테이프를 쏴대며 손을 흔드는 군인들을 보고 괜히 내 코끝도 찡해졌었는데 막상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었다. 당시 월남에는 십자성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 정도가 파병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처음 월남에 도착한 것은 1966년 봄이었다. 50여명의 파월 기술자 가운데 목수는 여섯 명이었다. 그중 하나로 뽑혔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했다.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비록 미군 대대장의 빽으로 뽑혔을 망정 비행기를 타고 월남에 간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김포에서 중화항공(Air China) 전세기를 타고 대만에 기착하여 점심을 먹고 난 후 다시 월남을 향해 떠났다. 새로운 세계, 그것도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이 나를 희망에 불타오르게 했다. 도대체 월남이란 어떤 나라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봉급뿐 아니라 뭔가 새로운 길이 뚫릴 것 같아 마냥 꿈에 부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모두 긴장과 함께 기대감들이 잔뜩 서려있었다.
드디어 전세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착륙했다. 눅눅한 열기가 확 느껴졌다. 한국에서 들이마시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였다. 딴 나라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야자수도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한낮이면 비가 한줄기씩 쏟아지는 것도 신기하게만 보였다. 사이공을 거쳐 퀴논에 도착하자 이미 우리보다 앞서 온 사람들이 일을 시작해서 시멘트 블록으로 기초공사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막으로 된 식당도 만들어 놓고 한식으로 식사까지할 수 있게 준비해놓고 있었다.
막사 앞쪽 개울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갈대나 서 있어야 할 개울가에 큼지막한 용설란이나 선인장들이 우거져 있어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 돈푼께나 줘도 들여놓을 수 있을까 말까한 큼지막한 것들이었다. 길이가 사람의 키만 했다. 그러나 선인장에 대한 감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작업을 하면서부터 선인장 가시가 거추장스러워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후 선인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월남의 나이든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빨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어서 마치 무덤 속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 같은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월남의 전통적인 관습으로 산후 칼슘이나 철분이 부족해서 생기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무슨 풀을 씹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물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나 외국인과 상대하는 젊은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희한하게 느껴진 것은 변소가 귀한 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열대성 기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들이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는 것이었다. 쫓기던 꿩이 급하면 머리만 틀어박는 것처럼 월남 여성들도 자기 머리만 돌리면 남들에게도 제 모습이 안 보이기나 하는 것처럼 길섶에서도 고개만 돌린 채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소변을 보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아무리 전쟁통이라 할 지라도 그런 여자들은 볼 수 없었다. 그런 여자들을 볼 때마다 왠지 월남사람들이 한국사람들보다는 미개하다는 편견이 내 머리 속에 자리 잡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쟁터여서 두려운 생각에 한국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몰려 다녔는데 한 달쯤 지나자 전쟁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지따로 따로 나다니기도 했다. 나 역시 혼자서 여기 저기 구경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술집도 가보고 식당에도 가보았지만 막상 가보면 별 신기할 것도 없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그 때 같이 일하던 동료들 가운데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넓디넓은 세계에서 한국에 태어나 월남과 미국, 그것도 뉴욕에까지 건너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미국 생활이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다. 황재훈 뉴욕 봉제협회장도 월남서 알게된 사람이고, 또 플러싱에서 살다가 최근 유명을 달리한 권종태씨도 월남에서 만났다. 권씨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무직으로 일했었는데 아주 재주꾼이었다.
나트랑에 도착하자 한국군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세탁공장 부지를 닦을 때도 한국군 공병대에서 와서 밀어 주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우리를 도와주는 한국군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쟁터이긴 하지만 우리들은 전투 요원이 아니었으니까 전선이 따로 없는 월남이라고는 해도 전쟁으로 희생되는 이들을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같이 일하던 군인 한 명이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세탁소 터를 닦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는데 중장비 조수 일을 하던 군인이 불도저 운전을 해보고 싶었던지 휴식 시간을 틈타서 고참 운전병이 앉았던 운전석 위에 올라타고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처음에는 구릉구릉 곧잘 굴러 나갔는데 불도저가 나무를 향하여 똑바로 굴러가더니 방향을 제대로 꺾지 못하고 어, 어, 하는 순간 나무둥치를그대로 쳐버렸다. 물론 불도저가 나무둥치를 들이받았다고 그 병사가 목숨을 잃을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데 있었다. 불도저로 나무를 들이받자 가지 위에 걸치고 있던 뱀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진 것이었다. 별로 크진 않았는데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그 사병의 어깨 위로 굴러 떨어지면서 목 근처를 물어버렸다. 아무도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씨가 무더워 윗통도 벗어놓고 있었던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어깨죽지가 시퍼렇게 변색되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그를 바닥에 눕히고 말을 시켜보았지만 맥이 빠졌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은 있었지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십자성 부대에 급히 연락을 해서 앰뷸런스로 그 사병을 병원으로 실어갔다. 목수 두 명과 불도저를 운전하던 사병이 함께 따라갔지만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불과 반시간만에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월남은 열대지방이라 뱀이 많으니 주의하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옆에서 사람이 뱀에 물려 죽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월남에서의 첫 충격이었다. 그런 일을 목격하자 왠지 순조롭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들어 맞았다. 퀴논에 도착하여 공사를 하고 나트랑을 거쳐 캄란으로 옮겨갔지만 그 사이 서너 달이 지나도록 열심히 일했는데도 월급은 한 푼도 안 나왔다. 자체 세탁공장 건물을 지으려고 시작했는데 돈이 나오질 않았던 모양이었다. 달이 바뀌어도 급여가 나오지 않자 기술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퀴논의 회사 사무실 앞에서 농성도 벌여보았만 별 진전이 없었다.
사장이 있는 사이공으로 몰려가서 거세게 항의도 하고 그래도 안 되자 주월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어떻게 주선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월남에 나와 있던 현대건설과 손을 잡게 되어서 일을 계속하면 밀린 임금까지 현대건설에서 주겠노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오늘날과 같은 거대 재벌이 아니었던 현대는 당시 군대 막사 따위를 짓는 건설공사로 월남에 진출해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김국배라는 여사장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혼자서는 힘이 부치는 것을 깨닫고 현대와 합작으로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태원에 사무실을 두고 미8군 영내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의복 수선 등의 사업을 하던 여성이었다. 60년대 중반 경기도 하삼공리 남한산성 인근 미육군 미사일 부대가 들어오자 그 부대의 피엑스 컨세션도 맡아 사업을 키우던 중 월남까지 진출하게 된 모양이었다. 용산과 남한산성에서 짭짤한 재미를 본 경험을 살려 월남까지 진출했지만 세탁공장을 세우고 기계를 돌리기까지는 벅찼던 것이었다. 취업자들에게 급여를 주고 또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의 운영자금이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세탁소 건설을 위해 데려간 목공만 하더라도 나를 포함하여 6명이나 됐고 일반 사무직까지 합하면 수십 명의 직원이 있었으므로제법 큰 액수의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사정이었고 우리들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희망에 들떠서 찾아간 월남에서 수개월 동안 임금도 못 받고 있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술자들은 그 동안 일한 보수를 못 받은 터에 또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선지 쉽사리 회사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회사측은 사이공에서 기다렸다가 일을 하든지 그게싫다면 귀국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돌아갈 경우 월남에서는 급여를 줄 수 없고 서울에 있는 현대건설에 가서 청산해 주겠노라고 했다.
결국 절반 정도가 월남에 남았고 나는 귀국을 택했다. 돈도 못받고 일할 바에야 한국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포에 도착하자 회사에서 나와 여권을 모두 회수해 버렸다. 기분이 씁쓸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전선도 없는 이상한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 월남까지 갔는데 몇 달만에 실패 아닌 실패로 1차 파월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여기서 ‘1차’라고 굳이 덧붙인 것은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월남 땅을 밟았기 때문이다.
몸은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마음까지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첫 번째 월남행이 실패로 끝났지만 내게는 또 다른 큰 수확이 있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전쟁터라는 게 으레 그렇듯 어딘가 돈벌이를 할만한 구석이 있을 것만 같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교동에 있던 현대 본사에 가서 타낸 밀린 급여도 한 달쯤 지나니까 어디론가 다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몇푼 안되는 돈은 금방 바닥났다. 그렇다고 마땅하게 할 만한 일도 없었다. 자연 살림살이도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지내는 생활 자체가 갈수록 답답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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